평양에서 서울로, 다시 세운 숭실의 역사

2025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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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LORIOUS SOONGSIL 평양에서 서울로, 다시 세운 숭실의 역사

박혜미 학예연구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다시, 숭실의 이름으로

자진 폐교 후 숭실대학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초, 숭실대학 졸업생 60여 명이 평양시 서문밖교회에 모여 대학 재건을 결의했다. 그러나 곧 평양이 공산 치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재건 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이후 자유를 찾아 남하한 숭실인들이 서울에서 재건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10월 27일, 영락교회에서 숭실 교우들과 유지 30여 명이 모여 드디어 ‘숭대재건확대위원회’를 조직하고, 곧이어 12월 17일 제1회 숭실대학 재건기성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한경직을 회장으로, 김양선을 서기로 선정하고 이사회 규정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숭실대학 재건을 위한 최초의 공식적인 모임이었고, 이를 통해 이사회가 탄생했다.

▲ 영락교회 임시교사 시절 사학과 학생들(1955)


자진 폐교와 신사참배 거부

 

1938년 3월, 숭실대학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자진 폐교로 항거했다. 당시 기독교 사립대학 중에서 유일하게 순전한 신앙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저항의 길을 택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한 숭실대학은 1954년 서울에서 부활했다.

12월 30일에는 숭실대학 재건을 위한 재단이사회가 역사적인 첫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배민수를, 학장으로 한경직을 선출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한 이사회에서는 재단법인 인가원과 학교 설립 인가원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학교 부지와 건물, 교육 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재건을 청원하였기 때문에 모두 불안한 상태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염려와 달리 중앙교육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정부의 인가와 공식 부활

 

중앙교육위원회를 통과한 설립 청원은 1954년 4월 12일 ‘재단법인 숭실대학’의 인가를 먼저 받고, 4월 15일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지 만 16년 만에 드디어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고 숭실대학이 부활한 것이다.

 


초기 임시 교사, 영락교회의 품에서

 

숭실은 문교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얻은 후 곧바로 개교 준비에 착수했다. 영문과, 사학과, 철학과, 법학과, 경제학과 등 5개의 학과에서 200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5월 10일 개교식을 열었다.

배민수 이사장은 “모든 가시울타리를 헤치고 수도에서 재건의 영광을 가지게 된 숭실의 장래”에 축복이 있길 간절히 기도했다.

감격 속에 막을 올린 개교식에는 평양 숭실 동문, 기독교계 및 사회 각계각층 인사와 먼저 재건된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의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참석하여 숭실의 부활을 축하했다.

서울숭실의 부활은 한경직 학장이 세운 영락교회의 품에서 가능했다. 영락교회는 한경직이 해방 이후 설립한 월남민 교회로, 초창기 예배당은 적산건물인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였다.

숭실대학은 이 예배당을 임시 교사로 사용했다. 54학번부터 56학번까지, 5개 학과 학생들이 책걸상도 없이 바닥에 앉아 다 같이 수업을 들어야 했던 고충도 있었지만, 영락교회는 당시 재학생들에게 교육의 터전이자 이후 상도동 캠퍼스 시대를 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상도동 캠퍼스 시대의 개막

 

1957년, 드디어 상도동 캠퍼스 시대를 맞이했다. 새로운 부지 확보와 교사 신축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동창회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기금을 확보하고, 서울시 상도동 1번지의 부지 33,47평을 불하받았다.

1957년 6월 17일, 상도동 부지 위에 석조 2층, 1,037평의 신축 교사가 완공되어 그 입주 예배가 거행되었다.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R.H. Baird, 한국명: 배의취)와 학장 등이 현관 테이프를 끊고 2층 강당에 올라가 입주 예배를 시작했다. 이사진, 교수진, 교우, 학부형, 내외 인사들과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한경직 학장의 사회로 예배를 시작했다.

이 예배에서 숭실인들은 죽음에서 숭실을 부활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숭실이 민족의 등불이 되길 기도했다.


뿌리 깊은 숭실의 정체성

 

서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숭실대학교가 올해로 개교 127주년, 서울숭실 세움 70주년을 맞이했다.

숭실대학은 시대를 앞선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 교육기관이자,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 악에 맞서 순전한 양심을 지킨 신앙 공동체였으며, 동시에 기독교 사립대학으로 유일하게 민족의 존엄을 지킨 선지자의 역할을 다했다.

숭실의 뿌리 깊은 정체성과 상징성은 지금 여기 서울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 상도동 캠퍼스 제1교사 입주(1957.6.17)

▲ 상도동 캠퍼스 제1교사 입주식에서 베어드 선교사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가 현관 테이프를 끊는 모습(1957.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