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국가대표 고기구 동문(생활체육 99)

2008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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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마크를 단 사나이, 이제 시작이다!
축구 국가대표선수 고기구 동문(생활체육 99)


폭 90m, 길이 120m에 이르는 축구장은 넓다. 하지만 이 공간 안에서 공을 주고 받으며 활약하는 열한명의 선수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국가대표선수라는 타이틀이 덧붙여 진다면 더욱 힘든 일이다. 이것이 세상이 28살의 나이로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된 고기구 동문을 주목하게 된 이유다. 끈기와 인내를 바탕으로 실력을 키워오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그의 인생에서 과연 축구는 무슨 의미일까?


고기구, 허정무호가 찾은 ‘숨은 진주’가 되다
지난 2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동아시아 선수권 축구대회’ 이후 인기스타 못지 않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 장신 공격수로 한국국가대표팀의 다크호스로 평가 받은 고기구 동문이 바로 그다. 축구 선수로는 늦은 나이, 묵묵히 실력을 쌓아온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K리그에서 활약 중인 ‘젊은 피’에 속하는 그는 국내파 선수들의 가능성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번 대회를 통해 재평가 받았다. 중국전에는 후반전에 투입되어 중국의 골문을 위협했고, 북한전에는 주전 원톱으로 기용돼 혼신의 힘을 다해서 뛰어 기량을 펼쳤다. 알고 보니 그 순간 고기구 동문은 부상을 견디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북한과 경기 당시에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않아서 경기를 나갔는데 전반전 10분 정도부터 허벅지가 아팠어요. 그래도 모처럼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꾹 참고 경기를 뛰었어요. 결국에는 경기가 끝날 때쯤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팠어요. 지금은 괜한 오기를 부린 게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하다가 거기서 죽어야 후회가 없을 거 같았어요.”


북한전 때 아무렇지도 않게 경기장을 누비던 그가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는 경기 직후 충칭에 있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결과 사타구니 안쪽에 미세출혈이 발견되었다. 2주 정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고 2월 23일에 열렸던 일본전에서는 뛰지 못했다.


“그 순간 감독님께 너무 죄송했어요. 일본전은 어떤 경기보다 중요한데… 하지만 다행히 염기훈 선수와 이근호 선수가 공격수로 나서서, 비록 무승부이긴 하지만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부상을 털고 일어나서 이제 개최되는 2008년 K리그에서 팬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해야죠.”



그가 부상에도 경기를 뛰어야 했던 이유는 28살이라는 축구선수로서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국가대표선수로 뽑혔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 국제 무대에 서게 된 그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언론은 186cm의 장신 선수인 그가 한국 대표팀에게는 부족한 제공권 확보의 ‘에이스’로 꼽았다. 특히 그는 헤딩과 슈팅력 모두 좋을 뿐 아니라 왼쪽에서 올라오는 크로스에 아주 강한 선수로 정평이 나있다. 축구의 절대적 순간을 만드는 ‘결정적 판단’으로 골을 만들어 내는 감각을 키우기 위해 남들이 보지 않는 순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이다.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그렇게 기쁘지도 않았고 그냥 담담했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거만한 마음은 더더욱 아니었고.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특히 부모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저를 축구선수로 기르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께 드디어 뭔가 보답해드릴 수 있는 순간이 왔구나 싶었죠.”


첫 골인의 순간 그리고…
고기구 선수는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대표팀은 물론 프로 무대에서도 빛을 보지 못했다. ‘잡초인생’, ‘대타인생’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기도 했다. 숭실대 졸업 이후 한국수력원자력에서 1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의 실력을 알아봐 준 사람은 정해성 현 대표팀 코치. 부천SK 감독이었던 그는 부상으로 축구를 포기할 뻔한 고기구를 다시 축구장으로 불러낸 스승이다.


“그때 무릎 부상을 당하고 좌절해서 몸이 90kg로 불었어요. SK 스카우트를 담당하는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고 무조건 언제가면 되냐고 물었어요. 뒤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정해성 감독님이 제 몸 상태가 어떻든 계약부터 하라고 하셨대요. 만약에 그때 제 몸을 보셨더라면 그런 말씀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정도로 슬럼프에 빠져 있었는데 정해성 감독님의 그 한마디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죠. SK 2군에서 다시 몸 만들기에 돌입했고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이 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는 2005년 시즌 1군 무대로 올라오더니5골 1도움이라는 깜짝 활약으로 가능성을 입증했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순간이었다.


“K리그에서 첫 골을 넣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경기 내용은 좋았는데 골이 나지 않았거든요. 광주 상무와의 경기였는데 헤딩슛하는 제 사진이 신문에 났어요. 표정이 너무 우울한 거예요. 기쁨보다는 그 동안 마음 고생한 일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K리그에서 그는 조재진과 박주영 선수를 잇는 대표 골잡이로 기대할 만큼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2006년 포항 스틸러스 선수 시절 성남과 플레이 오프를 앞두고 경기 중 그는 한 경기에서 세 골 이상을 기록하는 ‘헤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해 포항의 네 번째 우승 주역이 되었다.


축구장에는 공을 소유하고 있는 공격수 입장에서 적어도 네가지 선택을 해 주는 결정적 공간이 있다고 한다. 상대 골문과 가까운 공간인데 이곳에서 공격수는 날카롭게 찔러주는 골을 시도할 수도 있고, 같은 편 스트라이커에서 골찬스를 띄워주기로 양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상대의 수비가 완벽하다면 다시 벌칙 구역 반원 밖에서 준비하고 있는 미드필더에게 내줘서 중거리 슛을 시도하게 하거나 공을 돌려 수비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방법도 있다.


고기구 선수는 지금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하고 숨을 고르고 있다. 그를 찾아온 기회에 최선을 다했고 지금은 다시 적절한 기회와 상황을 맞아 골인의 명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숭실대 축구부를 졸업하고 실업 선수가 되어 첫 골인을 넣기까지 인내해야 했던 시간처럼 길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부상을 당했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가 만들어낼 90분의 잔디밭 위 드라마는 곧 계속될 테니 말이다. 홍보팀(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