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故 김예진 목사 아들 김동수(철학·56)동문

2007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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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故 김예진 목사 아들 김동수(철학·56)동문
前 Norfolk주립대학교 교수
現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숭실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나아가라”

김동수 동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평양 숭실 출신인 故 김예진 목사이다.  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동수 동문은 1956년 서울에 재건된 숭실대 철학과에 입학한 재건 2기생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65년 미국 피츠버그신학교 목회학 석사를 수료했으며, 1969년에는 피츠버그대에서 사회사업 석사 과정을 마쳤다. 또 그는 1976년 시카고 대학교 철학박사를 수료한 후 미국 버지니아 노폭주립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평생을 사회사업 교육과 관련 활동에 힘썼다. 김 동문은 현재 사회복지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도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숭실로 입학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울러 그 당시의 숭실의 모습과  학창시절에 대해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숭실이 재건한지 2년 째 되는 해인 1956년에 철학과로 입학했습니다. 이유는 평양에서부터 숭실이 많이 알려져 있던 대학이었거니와, 저의 아버지께서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 출신이기 때문이었죠. 또 당시 학장이셨던 한경직 목사께서 목사자녀들을 숭실로 부르신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당시 50년대 시절엔 나라상황처럼 숭실도 여러 면에서 어려웠습니다. 시설 및 여건도 좋지 않았고요. 그러나 시설은 빈약했지만 그 당시에는 좋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시 클럽활동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기도학생회’로 활동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나이 또한 천차만별이었는데 신학교를 마치고 입학하신 목사님도 계셨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독립운동가 故 김예진 목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에 대해 기억하시는 부분들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어릴 적 제 기억으로는 자상하시고, 열정적인 분이셨습니다. 제가 어려서 아버지의 대화상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아버지의 말씀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죠. 그리고 아버지께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목회활동을 하실 때 돈이 없는 아픈 사람들에게 의사노릇도 하셨죠.
아버지로서 직접적으로 얘기하시진 않았지만 나와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고, 옳은 일, 정의에 대해 강한 신념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저 또한 그런 아버지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모교에 ‘김예진 목사 장학기금’으로 거금을 출연하셨는데요. 그 속에서 숭실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교에 아버님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출연하신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우선 저는 숭실을 특별한 대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숭실은 기독교정신이 투철한 대학이고요. 또한, 일제의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이른바 스스로 ‘순교’한 학교입니다. 그 뜻을 이어받고자 6.25이후 서울에 와서 다시 재건해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이죠. 다른 기독교대학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숭실은 끝까지 투쟁하다가 순교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정신이 숭실대에 녹아있죠. 더불어 저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애국자가 숭실 출신입니다. 풍부한 정신적 유산을 가진 곳이죠. 발전기금을 내게 된 이유는 단순히 숭실이 모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숭실에서 배운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30여 년 간 미국 주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는데,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그동안 그 일을 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원래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닐 시절 미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바 있고요. 연이어 한인 교수와 목사들이 모여 80년대부터는 통일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심지어는 빨갱이 소리도 들었었죠. 그로인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문제로 한국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해외에서 남북에 대한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사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불의에 대해 굴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 성격은 아버지의 열정적인 성격과 달리 온건한 편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혼과 같이 사회정의, 민족의 자주성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죠. 제 어렸을 때의 꿈은 직업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겠다기보다는 바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6.25때 공산당에 잡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북한은 가족적인 원수인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픔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한국에 오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한국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지금에서라도 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을 부탁드려요.

숭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리와 봉사를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숭실의 모든 학생들은 단순히 지식을 터득하고 취업하기 위한 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런 정신적인 인격자가 되길 바랍니다. 숭실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정신은 우리 모두의 전통이자 유산입니다. 숭실이 가진 특별한 전통과 자랑을 내세워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가 주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 숭실대학신문 김보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