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의 산실, 한국 YMCA 이사장 안재웅 동문(기독교교육60)

2013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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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산실, 한국 YMCA 이사장 안재웅 동문(기독교교육60)

내년 100주년 맞는 한국 YMCA, ‘생명과 평화’의 정신으로 이끌 것

국내 제 1호 사회적 기업 다솜이 재단 창립하기도

[인터뷰: 최한나 홍보팀 학생기자(기독교 09), skyviki@naver.com]

지난해 6월, 한국 YMCA 새로운 이사장으로 안재웅 목사(기독교교육60)가 선출됐다. YMCA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비영리 단체로, 우리나라에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로 처음 창립됐다. 암흑기에는 학생3·1운동의 중심지, 가난한 시민들을 교육하는 기관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역사의 큰 일익을 담당해왔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 있는 단체로 손꼽히는 한국 YMCA는 곧 100주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에 있다.

인문학의 산실, 숭실과의 만남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안 동문은 자연스레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숭실의 기독교교육학은 전국에서 유일한 학문이었다. “집안에서는 제가 목사가 됐으면 하셨지만, 저는 왠지 목사가 되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요리조리 피해보려 했죠.” 하지만, 숭실에서의 생활은 그가 후에 신학의 길을 걷는데 아주 결정적인 경험이 됐다. “숭실은 인문학에 많은 애를 쓰는 학교였습니다. 철학과에는 안병욱, 조요한, 故최명관, 故고범서 교수님 등 당대 철학계의 대학자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사학과 故김양선 교수님, 기독교교육과의 주선애 교수님도 아주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안 동문은 기라성 같은 교수들의 슬하에서 수학하며 학문 실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입학하고 얼마 뒤,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한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형들 뒤롤 따라다니며 데모에 참여했는데, 그때 공부만큼이나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기독학생회와 함께 보낸 대학생활

안 동문은 대학4년간 기독학생회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기독학생회의 활동은 아주 각별한 것이었다. “종로에 있는 전국 기독학생회 본부로 각종 세미나, 강연회를 다니며 새로운 신학사상을 접하고, 타대학생들과 많은 교류를 했어요. 무엇보다 기독학생회 지도교수님이셨던 조요한 교수님, 성경연구반의 교사로 계셨던 故오제식 선생과의 인연을 잊을 수 없습니다.” 스승과 제자로 쌓은 4년간의 우정은, 안 동문의 졸업 이후에도 계속됐다. 기독청년사회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 등의 역사 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故오제식 선생이다.

기독학생사회운동 위해, 젊음을 헌신한 안재웅 동문

대학 4년을 마치고 난 뒤, 안 동문은 입대를 1년 앞두고 있었다. “1년 동안 교목실 조교로 지내면서, 책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책 읽는 재미로 1년을 보냈어요.” 이후 그는 군에 입대했고, 군목실에 배정받았다. 그곳에서도 학업의 끈은 이어졌다. “다들 텐트에서 지내다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군에서 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문교부에서 실시하는 국사, 영어과목의 유학시험을 통과해야지만, 유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틈틈이 공부한 덕분에 안 동문은 군에서 유학시험에 통과했다. 제대 후엔 유학준비를 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그 결과, 안 동문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인생은 예측하기 힘든 것이었다.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인데, 저에게 기독학생회 간사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기독학생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그는 잠시 유학의 꿈을 접어뒀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학생기독교운동과 점차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졌다. 간사생활은 쉽지 않았다. 유신체제로 시국이 어지러운 시기에, 기독교는 쉬이 당국의 감시대상이 되기 일쑤였고, 안 동문 또한 네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숱한 외부의 압력에도, 그는 학생들과 모이기에 힘썼다. 이후, 그의 열심은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아시아 총무로 까지 뻗어나갔고, 6년간 홍콩에서 총무로 재직하며 학생기독교운동에 크게 힘썼다. 안 동문은 WSCF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장학생으로 미국 에모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부득이 보스톤으로 이사를 가야해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학업을 마친 후, 안 동문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총무로 재직하고 은퇴했다.

은퇴 이후, 더욱 활발한 활동

국내 제1호 사회적 기업 ‘다솜이 재단 설립…한국 YMCA 이사장 선임

안 동문의 은퇴 이후 삶은, 그 이전만큼이나 활발했다. 먼저는 YMCA 후원회 이사, 유지재단 이사를 거쳐 연맹 실행이사로 일했다. 또한 현재는 YMCA 100주년 역사편찬위원장, 한국 YMCA 이사장에 재직 중이다. 더불어 ‘(재)함께일하는재단’의 상임이사로도 활동했는데, 상임이사로 재직하며 그는 노동부에서 인증한 제1호 사회적 기업을 설립했다. 바로 ‘다솜이 재단’이다. 중장년층 경력단절여성에게 ‘간병사’로의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재단이다. 현재는 ‘지적장애인 동반 고용 모델’을 통해 장애인에게도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안 동문은 현재 씨알재단 이사장이기도 하다. 씨알 재단은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 연구재단이다. 씨알 사상은 기독교 정신, 그리스철학과 서구 근대철학의 이성적 사고, 동아시아의 도(道) 철학을 한국의 한(韓, 큰 하나) 정신으로 융섭하여 깊은 영성과 세계평화를 지향한 정신이다.

YMCA 100주년, ‘생명과 평화’의 정신으로

씨알 사상이 평화를 지향하듯, 내년 100주년을 맞는 한국 YMCA는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을 비전 표어로 삼았다. “인간은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의 내용도 사랑의 실천이지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은 자연과 노동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연에게 자주 못되게 굽니다. 마구 파헤치지요. 우리가 숨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가족, 이웃에게 쏟는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도 묵상해보면 좋습니다.” 한국의 분단상황 또한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깃든 눈으로 봐라봐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안 동문은 마지막으로 숭실의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의 삐뚤어진 모습을 바로 알고, 알면 말하고, 말했다면 행동해봅시다. 분명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겠지요. 청년들의 이러한 떳떳한 모습이 바로 사회를 바꾸는 동력입니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더 좋은 사회를 위해 힘썼던 안 동문의 실천이 담긴 말이다. 안 동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으니, 그의 지혜라면 한국 YMCA가 한국 사회의 희망으로 더욱 성장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