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협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신 무협’의 대표작가 장재훈 동문(철학86)

2013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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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무협’의 대표작가 장재훈 동문(철학86)

 기존의 평면적 무협소설에 새로운 흐름 제시

《대도오》, 《비적유성탄》, 《야광충》등을 통해, ‘신 무협’의 대표작가로 거듭

 

[인터뷰: 최한나 홍보팀 학생기자(기독교 09), skyviki@naver.com]

좌백(장재훈 동문의 필명)은 한국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로 유명하다. 한국무협소설계에 한 획을 그은 《대도오》를 시작으로, 《생사박》, 《혈기린외전》, 《비적유성탄》, 《야광충》, 《금강불괴》등을 지으며 무협독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작가로 성장한 장재훈 동문은 단순하지만 정교한 글솜씨로 유명하여,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그의 연재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잣나무’라는 뜻의 ‘좌백’이란 필명처럼, 실제 그의 인생과 글에는 바른쪽에 반하여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철학과 진학

 원래는 타학교 영문과에 재학했던 장 동문은 특별한 소신 없이 지원한 전공에 고민이 많았다. 그의 질문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왜 살아야하나’라는 문제까지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결국 그 고민의 끈은 장 동문을 숭실대 철학과 진학으로 이끌었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은 것 말고는 별다른 철학과의 인연이 없던 그였지만, 그는 철학과를 수석 졸업할 정도로 학부시절 학업에 충분히 심취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 장 동문은 일 년에 가까운 직장생활을 했다. 혼자 하는 작업에 익숙한 그에게, 여럿이 함께 지내야하는 사회생활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 그는 곧 다시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것도 벌이가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일이 힘들다보니 공부할 시간보다 일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썼어요. 세차장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였어요. 새벽시간에 20대의 차들을 모두 세차하고 나서,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데 졸기만하고 이거 안 되겠다 싶더라구요. 공부하려고 일을 했던 건데, 막상 하고보니 주객이 전도된 거죠. 그래서 몸이 덜 힘든 일을 찾기 시작했어요.”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협소설 쓰기다. 물론 무협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보다 이전에 시작됐다.

장 동문이 초등학생이던 70년대는, 주로 잘사는 이웃집 친구 집에나 놀러가야 백과사전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책 자체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재밌다며 책 한 권을 빌려줬는데, 처음엔 역사소설인 줄 알고 읽었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던 게 소설의 배경이 현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 같지도 않고 헷갈리더라구요. 그래도 재밌게 읽었지요.” 후에 장 동문은 만화방에서, 자신이 읽었던 책의 장르가 무협소설이었음을 알게 됐다. 대만작가 사마령이 지은 <음마황하>라는 책으로, 이것이 장 동문이 무협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출발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무협쓰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무협소설 읽기는 그의 여전한 취미였다. 좋아하는 무협을 쓰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대학원생이었던 그에게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거기다 대단한 기술이 없어도 써볼만한 것이 무협소설이었다. “무협은 국문과를 졸업한 문학 전공자들이 신춘문예를 시도하다가 쓰는 게 아니에요. 무협소설 독자들 중에서, 무협을 읽다가 나도 한 번 써볼 수 없을까 해서 무협작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독자가 작가가 되는 것이죠.” 그는 장르소설이라는 것이 상당부분 패턴화 돼있어, ‘그 전형적인 스토리를 조금만 비틀면 어떨까’ 하는 상상력이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끔 이끈다고 말했다.

무협이라는 것이 아무리 이렇게 접근하기 쉬운 분야라 했어도, 그는 스스로 무모했다고 말한다.“ 일기도 안 쓰고, 글이라고는 레포트 밖에 안 써본 제가 무협전문출판사에 찾아가서 글을 써보겠다고 무턱대고 찾아갔어요. 출판사에서는 원고지 백매쯤 되는 분량으로 이야기를 써오라는데,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도 막상 써보니 되더라구요.” 그의 소설을 본 출판사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아직은 책으로 낼 수 없겠지만, 재능이 보인다는 것이다.“ 먼저는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집필 공간에서 무협쓰기를 연습했어요. 습작은 출판사의 감수위원에게 평을 들으며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칩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기준을 만족시키는 원고가 나오면 책이 출판 되는 것이죠.” 이렇게 무협소설쓰기의 왕초보였던 그는 어찌어찌 책을 내게 됐다. 몸은 덜 힘들었지만, 애초 목적과 달리, 무협쓰기란 것이 아르바이트로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일정시간만 들여서 적당한 보수만 받고 끝내야 하는데, 글을 쓰려니 전심전력을 다할 수밖에. 결국 공부를 할까 무협을 쓸까 고민하던 그는 공부를 포기하고 무협쓰기 작가로의 전업을 결심했다. “제가 쓴 소설의 반응이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쓰는 일 자체가 제 자신도 몰랐는데, 참 재밌더라구요. 철학공부를 시작할 때와 비슷했어요. 무슨 큰 뜻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고, 제 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막상 공부해보니 재밌는거죠. 공부라고 따로 생각은 안하고, 재밌어서 읽었던 것들이 곧 공부가 된 것이죠. 무협쓰기도 그래요. 문학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재밌는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써요.”

한국무협소설계의 새로운 지평, ‘신 무협’

장 동문은 한국무협소설계의 대표 무협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데뷔작《대도오》는 한국 무협소설계의 새로운 시작이라 불릴 정도로 그 의미가 대단하다. 무협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60년대부터 지속된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구도로부터의 탈피를 원한 독자들의 갈망을 장 동문은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이것이 한국 무협 소설계에 가져온 그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다. “무협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한 비현실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이 둘을 잇는 논리적 정합성이 없다면 소설 속 세계는 허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 됩니다. 또한 무협은 사람 사는 얘기를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죠. 아무리 잘생긴 사내라 해도,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건 실제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기존 무협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그냥 지나친 경우가 많았어요.” 새로운 무협쓰기는 이렇듯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설득력 있는 다리를 놓는 일이다. 전형을 탈피해서 좀 더 그럴듯하고 좀 더 글답게 쓰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바로 그것이다.

습작을 하던 시절부터, 장 동문은 기존의 무협과는 다른 모험적인 글을 많이 썼다. “제가 쓴 글에 매번 퇴짜를 놓던 선생님이 계셨어요. 주로 글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지적하시다보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연습생들도 작품 하나 내기가 어려웠죠. 이후 다른 선생님께서 새로 오셨는데, 글의 장점을 잘 봐주시던 분이셨어요.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써보라고 하셔서, 이전에 퇴짜 맞았던 지적들을 다시 다 적어 보여드렸죠. 예를 들어, 주인공을 못생기게 그린다든지 해서요. 글을 보신 선생님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도 제 작품이 무협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했는데, 출판사의 믿음 덕분에 결국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도오》가 아무리 기존 무협과 다르다 해도 여전히 영웅담이고 활극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작품에 특별히 자기 자신 그리고 삶의 흔적을 담아내려 했는데, 그것은 그가 전하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평범한 주인공, 현실적인 스토리

예전의 무협이 초라한 현실과 괴리된 비현실을 배경으로, 비범한 주인공이 이룬 업적들을 기록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현실에서 마주치는 보통의 사람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택했다. 무협이라는 비현실에서도 평범한 인물로 그려진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외부의 평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다. 자기 밖에 존재하는 것들. 예를 들면, 돈과 명성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람을 그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전 무협은 평범한 사람의 신분상승을 그 출발점으로 해요. 흔히들 생각하듯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 속에도 영웅의 씨앗이 있어’라고 말하죠.” 하지만 장 동문이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현재 네게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건 지금 너의 한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뭐가 나쁜데?” 이것이 그가 독자에게 보내는 물음이다.

장 동문은 이런 물음의 출발을 철학과의 배움에서 찾았다. “공부를 하다가, ‘대학 졸업한 다음, 취직하고 결혼하고… 그 다음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더라구요. 사실 자기만 좋다면 백수로 뒹굴어도 나쁠 건 없지요.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쫓기듯 살아가는 건 슬픈 일입니다. 중요한 건 ‘스스로 만족하는지 안하는지. 스스로 선택한 길인지 아닌지’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자연스레 그의 소설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자신의 글을 통해 인생의 굴레에 지친 독자들이 숨을 잠시 고르고,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무협의 새로운 변신

현재 무협은 예전만큼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무협을 한 때의 유행에 가까운 것으로 보면서, 흘러가는 시류에 대해 그리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접근하진 않는다. “무협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면서, 당시 무협은 오락 장르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어요. 생각해보면, 총기 규제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처럼 총싸움이 가능한 활극 장르가 있을 리 만무했고, 추리도 우리나라 정서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죠. 하지만 무협 안에는 싸움, 연애, 뻥이 다 있었어요. 오락으로는 그야말로 제격이었죠.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판타지가 수입 되면서, 사실 소설보다는 게임, 영화 쪽으로 젊은 층을 위주로 한 독자들이 많이 옮겨갔어요. 시각적으로 훨씬 화려하니까요.”

그렇지만 요즘 무협은 다양한 변신을 통해, 다시금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무협이 국내에 막 유입될 당시, 무협은 하위문화라 불리며 학계에서 언급조차 꺼리는 풍토 위에 위태롭게 서있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 먼저는 무협이 오락을 위한 장르기 때문에,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를 이뤘어요. 문학을 어떤 수준 높은 고귀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무협의 위상이 그리 높지 못했구요.” 하지만 2000년대부터 무협의 판타지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무협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순문학은, 독자들과는 유리된 쓰는 사람들끼리의 내부리그가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응답으로 순문학에도 조금씩 장르가 도입되면서,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시도됐죠. 뿐만 아니라, 요즘 부쩍 늘어난 판타지 드라마에서도 무협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철학 입문서 집필, 게임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

장 동문은 요즘 새로운 취미활동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로 목공이다. 잘 만든 목공품들이 집안 곳곳에 심심치 않게 자리하고 있다. 같은 무협작가인 아내 진산에게도 언젠간 잘 다듬은 나무인형 하나를 선물할 생각이다. 더불어 그는 현재 무협소설 외에도, 청소년을 위한 기초 철학서적을 집필 중에 있다. 청소년들이 보다 쉽게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밌는 판타지 스토리로 책을 구성했다. 한 권의 책을 쓰기위해 꼬박 2년을 공부한다는 그는 벌써 4번째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협을 배경으로 한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좋아하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제일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동문은 노동과 유희가 통일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만족해하는 듯 했다. “처음에는 물론 즐겁기만 했지만, 지금은 고민도 많아요. 아무래도 직업적으로 글을 써야하니,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며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아직 제게 노동과 유희가 일치된 삶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것 같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