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출신 최초의 국회의원 최동익 동문(사회사업 81)

201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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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출신 최초의 국회의원 최동익 동문(사회사업 81)

포기 모르는 ‘현장활동가’…최근 민주당 원내부대표(대외협력담당)로 선임도

[인터뷰: 최한나 홍보팀 학생기자(기독교 09), skyviki@naver.com]

제19대 국회에 진출해 있는 최동익 동문(비례대표/민주당)은 본교가 배출한 최초의 국회의원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 사무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 회장, 국회보건복지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사회복지를 공부한 후 다년간 현장에서 활동하며 필요한 정책을 세우는데 주력해 온 현장활동형 초선 정치인이다. 실제로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본지 한 달이 넘었다는 최 동문. 아직도 사회 곳곳을 찾아다닌다는 그의 말을 반영하듯 그의 이력은 발로 뛴 흔적이 가득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2살 때, 의료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10살 때는 약물사고로 시력을 거의 잃은 최 동문.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자연스레 약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서울 맹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당시의 열악했던 환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쯤 이었을까요?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 날씨였습니다. 기숙사의 방장이었던 저는 초등학생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세수를 시켰습니다. 꽝꽝 얼어있는 얼음을 깬 물로 말이죠. 물론 당시는 모두 어렵게 살 던 때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를 키워보니 8, 9살의 어린 아이들이 얼음물로 세수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자랐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인거죠." 15살의 최 동문이 느꼈을 그 추운 기억은 그로 하여금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을 하도록 이끌었다.

‘노력’으로 이룬 기적과 같은 성과

그는 사회사업학과(현 사회복지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어려운 이를 돕겠다는 꿈을 품고 본교에 입학하여 오로지 학업에만 몰두한 결과다. 이후 그는 본교 대학원을 거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석사과정을 마쳤다. 오랜 학업생활을 이어갔지만, 실제 그는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공부하기를 참 싫어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인데 열심히 할 수밖에요." 때문에 최 동문은 자신이 어떻게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중3때 영어를 포기했는데 말이죠.(웃음) 숭실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유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외국인 선교사에게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씩 교습을 받으며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이후 토플 점수를 완성하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에서는 동시통역 일을 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금세 늘었습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갈 정도로 영어를 빨리 익혔어요." 미국을 떠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최 동문은 외국인을 만날 때면 여전히 영어를 자연스레 구사한다. “무언가를 극복해야할 순간에 처하면 어떤 노력을 해서든지 해내고자 합니다.”

그래서인지 되돌아보면 제가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미시간 대학에서의 첫 수업 날이었다. 통계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과제를 교수에게 이메일로 제출하는 것이 첫 수업의 할 일이었다. ‘컴퓨터가 이런 것이구나’ 정도만 알고 있는 그에게, 대학원 첫 과제는 큰 난관일 수밖에 없었다. "이메일이 무엇인지도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과제는 해야 하니 ‘저장하기’, ‘불러오기’ 그리고 오타체크를 해주는 세 가지 명령어만 배워서 밤새 과제를 했습니다.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 까지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어요. 하루만에 컴퓨터를 익히고 과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최 동문이 현장에서 활동하던 때에도 기적 같은 일은 많이 일어났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회’를 준비할 때입니다. 복지관 예산을 세우고 설립허가를 받기위해 기획재정부에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담당사무관께서 허가를 안 해주셨어요. 기획예산처에서도 예산을 주겠다고 했는데 말이죠. 사무관님이 국회에서 운영비를 받아오면 허가를 내주겠다는 말에 이례적으로 운영비까지 받아왔습니다. 몇 년 뒤 그 분께서 저에게 사과를 해오셨어요. 당시에는 제가 이렇게 열심히 잘 할 줄 모르고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 하셨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냈는지 다시금 놀라월 할 때가 있습니다."

현장활동가에서 정치인으로의 발돋움

"사회복지를 20년 가까이 공부하고 현장경험을 하면서 예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의 경우 사회복지가 사회로부터 오는 기부금에 의해 운영되지만 한국은 운영금의 90%이상이 정부로부터 옵니다. 때문에 법과 제도, 규제가 많아요. 또한 공무원은 순환보직 이다보니 이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이 배치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전문가와 소통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늘 예산문제로 담당 공무원과 싸웠던 기억이 나네요. 현장에서의 그런 답답함으로 인해 ‘차라리 국회의원이 되어 문제점을 시정하는 게 낫겠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현장에 나타나는 제도적 문제점을 잘 아는 만큼 잘 개선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때문에 현재 국회의원직을 맡고 있지만, 저는 아직 제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해요."

좋은 ‘정책’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최 동문이 현장활동가로 있을 시절, 그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포기를 모르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추진하는 정책이 마무리 될 때까지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비시각장애인들은 일을 처리할 때 눈으로 확인하면 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머리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합니다. 그러다보니 일만 벌리고 정리하지 못하면 상황이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매사를 확실히 매듭짓고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요. " 최 동문의 이러한 집념은 국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정책 활동의 경우 그는 이의 제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낼 때까지 목소리를 낸다. 일례로 그는 임기 내 장애아동복지시설의 식대비를 높이는 것이 그가 목표로 한 주요 정책과제 중 하나였다. 지역아동센터에 제공되는 식대비가 3000원 이상인데 반해, 장애아동복지시설의 식대비는 1420원에 그쳤기 때문이다. "컵라면 한 개 값보다 적은 식대비로 취약계층의 아동들이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국정감사를 통해 그가 꾸준히 이 사실을 지적한 결과, 현재 장애아동 식비는 2069원으로 40%이상 인상됐다. 어린 시절, 복지시설에서 고픈 배를 밤새 움켜쥐던 때가 있었다던 그는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 의정활동 중의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관리가 미흡한 인큐베이터로 인해 수많은 신생아가 장애인이 되는 사례를 지적하여 기존에 없던 인큐베이터 관리 기준을 도입시키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 결과, 최 동문은 2012년,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 우수상임위에 선정됐다.

결과는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학교는 학교의 이름보다는 좋은 인재를 얼마나 많이 배출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부시절, 월드비전 회장으로 계셨던 박종삼 교수님께서 제게 ‘장애는 너에게 가장 큰 장점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한계 지으며 살아왔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까지 걸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노력해보지 않고, 한계까지 가보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결과만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좋은 인재가 되는 것은 도전하고 노력하고 용감하게 사는 것과 멀지 않습니다. 제겐 시각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인재가 되기에 저보다는 좋은 여건을 지니고 계실 겁니다.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한 번 번 도전해봅시다!

‘정치’보다는 ‘정책’에 주력하고 있는 최 동문은 여전히 발로 뛰는 현장에 익숙해보였다. 장애인 비례대표로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쉽게 국회에 입성했지만, 그는 주어진 임기 내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자신의 핸디캡을 뛰어넘어 지금보다 성장한 정책가이자 정치인이 되고싶다’는 최 동문. 그는 장애인계를 대표한 국회의원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에 있다고 전했다.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에서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하는 바람을 담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