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명 개화에 힘쓴 윌리엄 베어드]
교육 수요 많은 평양 파견돼 숭실학당 세워
<3> 새로운 부름을 받다
<사진=평양에 세워진 숭실중학교 전경>
청일전쟁 이후 평양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지자 조선선교부는 1896년 10월 베어드를 교육자문으로 임명해 서울로 이주시켰다. 그가 조선선교부의 교육전담 선교사로 임명받은 것은 미국에서 대학 학장을 역임한 그의 교육 경험 때문이었다. 서울에 온 베어드는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 학당과 곤당골, 연못골 교회에서 잠시 사역했다. 이듬해인 1897년 8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 총무 스피어가 참석한 가운데 선교부 연례모임이 열렸고, 이 모임에서 베어드가 교육자문으로 입안한 ‘우리의 교육정책’이라는 논문이 채택됐다.
논문은 베어드가 자신의 교육 경험과 한국 실정을 토대로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경륜을 밝힌 것이었다. 베어드는 이 글에서 미션스쿨의 설립 목적이 “토착교회의 발전과 그 지도자 양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교육 분야에 적용한 이른바 토착적 기독교 교육론이었다. 이는 그동안 표류해 오던 선교부의 교육정책을 확고히 한 것이었다.
중등 교육을 위한 학당 설립
1897년 10월 베어드는 이 교육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평양으로 파송됐다. 평양 지역의 늘어나는 초등학교 졸업생들과 순회전도로 인한 교회 수의 증가는 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공급할 중등교육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에 평양선교지부는 베어드의 ‘중등교육반’ 개설을 허락했다. 그러나 아무런 시설도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 1897년 10월 초 사랑방에서 중등교육반을 시작했다. 이것이 ‘평양학당’이었다. 학교의 이름은 1901년 한학자요 교사인 박자중이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을 따라 숭실(崇實)로 지었다. 베어드는 이를 진리의 숭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실용주의적 숭실의 학풍을 잘 보여준다.
숭실학당의 초기 교육 사역은 부산에서와 같이 서당식 교육이었다. 1년을 보내면서 베어드는 중등교육의 제도화를 구현하기 위해 1898년 가을 학기에 학생 모집을 공고했다. 60여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고 이 가운데 학력 건강상태 경제상황 등을 고려해 18명을 선발했다. 학당의 수업 연한은 5년이었으며, 교과목으로 성서 지리 산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학당에 중국과 조선의 각종 서적들을 비치한 도서관도 설치했다. 학생과 학급 수가 증가하자 베어드의 사랑방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베어드는 선교부의 지원금 700원과 선교사 스왈렌의 기부금 1800원으로 1901년 4월 11일 신양리 39번지의 부지 위에 7개의 큰 교실을 둔 교사를 건립했다. 이 건물은 선교사 그레이엄 리가 설계했는데, 외관은 한국적인 모습을 지니면서도 내부는 서양식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아더 브라운이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뛰어난 건축물 중에서도 최고의 건물”이라고 예찬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편, 베어드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반영해 교육 언어를 한국어로 정했다. 학당 초기 적당한 교과서가 부족하자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의 중등교육 교과서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 출판했다. 학교의 경영모델로 미국 장로교계 학교인 파크대학과 포이넷 아카데미를 참고해 학생자조부(기계창)를 설치, 운영했다. 이는 선교부가 모든 교육비를 지출하는 예수교학당의 운영 실패를 거울삼아, 학생의 절반 정도는 등록금을 스스로 지불하면서 재학하고, 나머지 반은 학생자조부를 통해 스스로 노동하게 함으로써 그 수입으로 공부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렇듯 베어드는 초기단계부터 명확한 교육이념과 확고한 방법론으로 평양의 중등교육 확립을 위해 힘을 다했다.
근대 고등교육의 효시, 숭실대학의 설립
19세기 말 대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의 영향으로 1900년 뉴욕과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에큐메니컬 선교대회가 개최됐다. 이 선교대회에서는 피선교지에서 교파 간 연합사업의 추진이 강력하게 장려됐다. 이에 한국에서도 선교사들 사이에 교파 연합사업안이 공론화됐고, 1905년 6월 북감리교 선교부 총회는 교육 분야의 연합을 위해 다른 교파 선교사들을 초청했다. 이 총회에 참석한 베어드는 한국 내 고등교육에 있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동 방안을 제의했다. 뿐만 아니라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총무인 아더 브라운에게 편지를 보내 교육 분야에 있어 연합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이러한 베어드의 노력으로 1906년 조선선교부의 허가를 받아 감리교와 연합으로 ‘합성숭실대학’(The Union Christian College)이 출범했다. 이로써 국내 최초의 근대대학이자 고등교육의 효시였던 숭실대학이 탄생했다.
숭실대학이 출범하자 장로교는 교수진으로 교장인 베어드를 비롯해 맥쿤 모우리와 베어드 부인 맥머트리 등을 임명했다. 감리교는 베커와 빌링스 목사 등 세 사람을 지원했다. 장·감 선교부의 연합으로 학생 수가 급속히 증가하자 교사 증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베어드는 평양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6000원을 모금하고, 미국 제일감리교회로부터 2500달러를 기부 받아 과학관을 건립했다.
1912년에는 장로교 선교부의 7000달러 자금과 미국교회의 도움으로 3층 양옥으로 된 본관 건물을 준공했다. 이 밖에도 기상대와 박물관 체육관 기숙사 기계창 교수사택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숭실대학 캠퍼스는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공산당에 의해 임시본부로 사용됐으며 지금도 북한의 핵심 정부기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베어드는 숭실대학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정해 교육했다. 초기 교과목은 성서 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영어) 변론 음악 등이었다. 1912년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과목들을 추가로 개설하면서 명실상부한 대학 교과과정을 마련했다.
합성숭실대학의 설립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근거한 한국교회 연합사업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숭실대학의 시설과 교과과정은 당시 한국교회의 기독교 교육시스템의 최정점에 위치했다. 베어드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초등학교부터 대학부까지 일관한 기독교 학교체제를 관서지방에 세운 것이다.
김명배 교수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본 기사는 국민일보 4월 11일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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