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베어드 박사] 부산에 제2 한국 선교지부 세우고 사랑방 전도

201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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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명 개화에 힘쓴 윌리엄 베어드]

부산에 제2 한국 선교지부 세우고 사랑방 전도

<2> 베어드의 초기 선교 사역

<사진=1895년 1월 선교기지 내 한문서당 학생들과 베어드 선교사(왼쪽 뒷줄 끝)가 함께한 모습>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조선선교부가 창립된 지 7년이 지나 두 번째 선교기지 개설을 허락했다. 이에 조선선교부는 1891년 2월 개최된 연례모임에서 항구도시의 중요성을 감안, 부산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고 베어드 부부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베어드는 언더우드와 함께 2월 25일 서울을 떠나 동래에 선교용 부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서울로 돌아온 베어드는 그해 여름을 서울과 남한산성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보낸 후 9월 선교지부를 본격 개척하기 위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온 베어드는 감리교 선교사 하디의 집에 기거하면서 영국 영사 허드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 거류지에서 약간 떨어진 영서현(현 코모도호텔 부근)에 세 필지의 대지를 구입해 부산 선교기지를 마련했다. 베어드는 9월 24일부터 선교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인 건축업자와 인부들의 불성실로 공사가 지연됐다. 베어드는 이듬해 4월 15일 미완성의 선교사택(일명 Omnibus House)에 입주, 도로 쪽으로 난 방을 ‘사랑방’으로 개방하고 전도를 시작했다. 이로써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선교 역사상 두 번째 선교지부를 부산에 설립한 셈이 됐다.

 사랑방은 방문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전도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베어드에게 사랑방은 예배와 세례, 기독교 서적 번역, 서당교육 등 모든 활동의 중심지였다. 사랑방에는 거의 매일 조선인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예배와 주일행사, 나아가 선교사의 가정생활 등 여러 가지 일들을 지켜보았다. 베어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 소책자를 무료로 나눠 주거나 구입하도록 권유했다.

  이 사랑방 전도는 1892년 11월 영서현(또는 영선현)교회로 발전했고 한강 이남 최초 교회인 초량교회의 모태가 됐다. 그러나 베어드의 열정적 사랑방 전도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한국인에 대한 첫 세례는 2년 뒤인 1894년 4월 22일에 베풀어졌다. 그들은 호주 선교사 맨지스의 어학선생 심상형과 이도념, 그리고 귀주였다. 7월 16일에는 베어드의 어학선생 서 초시와 유모 곽수은이 세례를 받았다.

 베어드가 1894년에서야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세례 지원자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주일성수, 우상숭배 거부, 금욕생활 등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후보자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검증한 것은 베어드가 초기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전형적인 ‘청교도’였기 때문이었다.

 베어드는 사랑방에서 조선인 조사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기독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부산 출신 서 초시를 자신의 어학선생으로 고용해 1893년 ‘텬로지귀’ ‘구셰진쥬’ ‘텬로지명’ 등 3권의 소책자를 펴냈다. 이 소책자들은 초기에 간행된 전도문서 혹은 교리서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본질과 기본교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지침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베어드는 1895년 1월 사랑방에 서당을 열고 교육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조선인 하인들과 부두 노동자, 일본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었다. 처음엔 한문을 교육했고 이후 성서와 산수, 지리 등을 함께 가르쳤다. 학생들은 매일 예배에 참석했다. 주일예배에도 참석하도록 권장됐다. 당시 서당은 교육기관이라기보다 자선기관이며 전도기관이었다. 부산에서의 서당교육은 훗날 베어드가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워 운영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됐다.

 부산 선교지부를 세운 후 베어드는 광범위한 순회전도여행을 실시했다. 1892년 5월에 서상륜이 내려와 베어드와 함께 남해안 일대를 돌아보며 전도했다. 1개월 만에 서상륜이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가자 그의 동생 서경조가 내려와 1893년 4월과 5월, 2달 동안 베어드를 도와 경상도 지역을 순회했다. 그러나 서경조도 복음의 불모지에서 한계를 절감한 후 베어드의 간청을 뿌리치고 서울로 돌아갔다.

  서경조가 떠난 후 황해도 해주 출신의 고학윤이 베어드와 함께 1893년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내륙지역을 여행했다. 1894년에도 베어드는 어빈 박사, 고학윤과 함께 내륙 도시들을 탐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순회전도여행 중 베어드 부부는 부산에서 태어난 첫딸 낸시 로즈를 뇌척수막염으로 잃게 된다.

 애니 부인은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며 선교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전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찬송시 두 개를 작사했다. 이것이 찬송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와 375장 ‘나는 갈 길 모르니’이다. 애니 부인의 이 신앙고백은 지금도 슬픔 가운데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1896년에도 베어드는 8회의 지방 순회전도여행을 했다. 총 1600㎞ 거리로, 273일이 걸렸다. 마산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대구 전주 목포까지 다녔다. 베어드의 순회전도여행은 후일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어드는 처음부터 한국 남부에 선교기지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순회전도여행을 했다. 1896년 1월 조선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내륙지방 선교를 위해 대구에 가옥을 매입하고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가 대구에 선교지부를 개설한 이유는 지리·정치적으로 경상도의 중심이며, 서울과 부산 사이의 주도로에 위치해 있는 대도시로 ‘령’이라는 대규모 시장이 서기 때문이었다. 베어드는 대구 선교지부를 개설한 후 1896년 한 해 동안 부산과 대구를 왕래하며 제임스 애덤스와 선교지부 개척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평양에서의 선교사역이 급속히 발전했다. 1896년 10월에 열린 조선선교부의 정기 연례회의는 대구 선교지부를 애덤스에게 맡기고, 베어드를 조선선교부의 교육 고문으로 임명해 서울로 이주토록 결정했다. 이로써 베어드는 서울로 이임했지만 홀로 두 개의 선교지부를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김명배 교수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본 기사는 국민일보 4월 4일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가기

홍보팀 (pr@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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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순회전도여행을 떠나다

 사랑방 전도를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