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 제3회 콜로키움에서 ‘옥호열의 생애와 활동’ 논의

2019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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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 제3회 콜로키움에서 ‘옥호열의 생애와 활동’ 논의

 본교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HK+사업단)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은 지난 3월 21일(목) 4시 30분부터 창의관 605호에서 ‘옥호열(해롤드 뵐켈, Harold Voelkel)의 생애와 활동’을 주제로 제3회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마은지 초빙교수는 ‘해롤드 뵐켈-가족 문집'(Harold Voelkel-A family anthology)에 나타난 옥호열의 생애와 활동을 통해 나타난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사건과 일화를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소개했다. 또한 근대 전환기 선교사에 의해 외래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한국적으로 변용되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옥호열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1929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국에서 선교 사역에 임했다. 소안론(W.L.Swallen, 숭실교사 건축을 위해 유산으로 받은 1,800달러를 기부함) 선교사의 딸과 결혼해 평양 숭실의 서울 재건을 위해 헌신한 옥호열 선교사는 장인과 사위 2대에 걸친 숭실 사랑을 보여줬다.

 옥호열 선교사는 유엔군 군목의 자격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인천에서 투항한 5만여 명의 공산국에게 선교를 시작했다. ‘반공포로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옥호열 선교사는 포로 선교에 힘써, 평양에서 전도활동으로 만난 포로는 3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흥남철수작전 때 3만 9천여 명의 교인과 주민들을 남하하게 했으며 이후, 한국 군목제도 창설에도 큰 공을 세웠다.

 마은지 교수는 “그의 사역과 행적들은 곧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증언과 다름없다. 역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옥호열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며 “옥호열 선교사는 격동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에 대해 놀라운 인류애를 실천했다. 일제시대, 해방, 한국전쟁, 민군정기, 건국, 그리고 1974년 본교 교수로서 활동하다가 퇴임할 때까지 남한과 북한 땅을 오가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사역들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한편, 본교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에서는 <근대 전환공간의 인문학, 문화의 메타모포시스>라는 아젠다로 연구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8년 11월 제1회 콜로키움 “북한기독교 이야기”와 동년 12월 제2회 콜로키움 “일제강점기의 기독교문학”을 성황리에 개최한 바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본교에서의 옥호열 선교사, 포로 캠프에서 설교하는 옥호열 선교사>  

홍보팀 (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