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베어드 박사] 서울이냐? 평양이냐? 연합대학 장소 논란

2016년 4월 26일
3281

[조선 문명 개화에 힘쓴 윌리엄 베어드]

서울이냐? 평양이냐? 연합대학 장소 논란

<4> 평양외국인학교 설립과 대학 문제 대립

<사진=평양 숭실대학의 16회 졸업식 장면>

 한국교회는 선교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10만명의 성도와 노회, 총회를 갖춘 자치적 교회로 성장했다. 이 성공은 교육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베어드가 평양에 부임한 지 15년 만에 그의 교육정책에 따라 평양 지역에만 100개 이상의 초등학교가 생겼고, 3000명 이상의 남녀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들은 지역 교회들에 의해 운영됐고, 그가 교육시킨 교사들이 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국 각지에 기독교 중등학교들이 생겨났고 평양에는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으며 모든 기독교 교육체계의 정점인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이 있었다.

평양외국인 학교의 설립

 베어드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학교도 평양에 설립했다. 1899년 3월 첫 안식년을 맞은 베어드는 휴가를 떠나기 전 평양 지역에 거주하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 모두를 그의 집에 초대했다. 베어드는 이들에게 외국인학교의 설립을 제안해 동의를 얻었다. 그는 안식년 기간 중 미국 캔자스 주 공립학교 교사인 루이스 오길비를 만나 한국에 외국인학교 설립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녀가 교사로 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이듬해 5월 한국으로 돌아온 베어드는 자녀들이 있는 스왈렌 부부, 리 부부, 웰즈 부부 그리고 감리교의 노블 부부 및 폴웰 부부 등과 함께 외국인학교를 출범시켰다. 이것이 평양외국인학교의 시작이었다. 베어드에 의해 시작한 평양외국인학교에는 1920∼1930년대 한국 전역을 비롯해 몽골과 일본,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외교관, 상사 주재원들의 자녀들까지 입학했다. 학교는 선교사들이 사역 현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자녀들을 위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대학문제의 발생

 에큐메니컬 흐름에 의해 조선에 ‘하나의 연합대학’ 구상이 떠오른 것은 1912년이었다. 하지만 설치장소에 대해서는 평양이 좋은지, 서울이 좋은지를 두고 미국의 각 선교본부와 조선에 있는 각 선교부에서 대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대학문제(College Question)’였다. 문제의 발단은 1912년 3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교 선교부 연례회의의 결의였다. “전 한국에 하나의 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되 그 대학의 위치는 서울로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는 모든 재한선교부를 대표하는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었다. 이 감리교의 결정은 평양 숭실대학의 폐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신학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보수적인 베어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감리교의 선교 방법과 정책 때문이었다. 감리교는 토착교회를 세우는 느린 과정을 진행하지 않고, 서울에 최고의 대학을 세우고자 했다. 어쨌든 감리교가 한국에 하나의 연합기독교 대학을 설립하고 그것을 서울에 두기로 결정하자 사태는 극도로 악화됐다.

 교육위원회가 각 선교부의 의견을 조사하자 북장로교·남장로교·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모두 평양의 숭실대학을 폐교하고 서울에 다른 대학을 설립하려는 감리교의 주장을 극력 반대했다. 그러므로 교육위원회는 한국에 하나의 대학만을 갖는다는 원칙을 가결하고, 평양의 숭실대학이 기존의 대학이기 때문에 서울에 새로운 대학을 세울 것인지 여부에 대한 토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감리교 측이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교육위원회 탈퇴를 통보하자, 교육위원회는 1912년 12월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 교육위원회는 대학 위치로 평양을 지지하였고 선교사들도 평양 63표, 서울 37표로 평양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다수가 평양을 지지함에도 장로교 선교부 내부가 감리교의 입장을 지지하는 서울의 언더우드 측과 이를 반대하는 평양의 베어드, 마포삼열 측으로 분열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교육위원회는 그 결과를 미국의 합동위원회에 보고하고 결정을 위임했다.

 교육위원회로부터 위임받은 합동위원회는 이 문제를 검토하고 대학 위치를 서울로 정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도 이를 승인했다. 미국 선교본부의 결정이 나자 한국선교부는 즉각 거부했고 길고도 격렬한 항의를 지속했다. 1914년을 넘기면서 한국선교부의 항의에 부딪친 미국 선교본부는 본부서한 249호를 통해 두 대학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한 대학과 반(半)대학을 허가한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 또한 사실상 숭실대학을 초급대학으로 운영할 것을 조건으로 대학의 존치를 승인한 것이었다. 한국선교부는 이러한 상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베어드는 “이 결정은 내 양심을 걸고 협력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 방법과 정책, 목적, 행정 등은 내가 일생을 바쳐 걸어왔던 길과는 정반대이다. 이후 교육 분야에서 진행될 정책은 내가 자신 있게 지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선교본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학문제의 결과

 1915년이 되면서 한국선교부는 대학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미국 장로회 총회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총회는 이 문제의 중재인으로 의장이었던 토머스 굿을 임명하고, 1920년 여름까지 선교본부와 선교부의 대표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또 많은 서신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총회는 서울과 평양에 대학 설립을 승인해 선교본부와 선교부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제공했다.

 그러나 감리교는 1914년 평양에서의 교육 사업에서 이탈해 1916년 서울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더불어 조선기독교대학, 곧 연희대학을 발족시켰다. 숭실은 감리교가 이탈한 후에도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장로회의 지원으로 계속 존속했다.

 그러나 대학문제의 후유증으로 베어드는 1916년 3월 31일 숭실대학 교장직을 사임했고, 안타깝게도 언더우드는 암이 발병해 1916년 미국에서 서거했다. 대학문제는 대학의 설치 장소뿐 아니라 교육 이념과 성격에 관한 문제였다. 선교사들 사이에는 평양이 ‘복음적’이며 서울은 ‘세속적 교육’을 중시한다는 이해가 있었다. 곧 숭실대학의 ‘토착적 기독교교육론’과 연희대학의 ‘기독교사회교육론’의 대립이었다.

김명배 교수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본 기사는 국민일보 4월 18일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가기

홍보팀 (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