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베어드 박사] 언더우드·마포삼열 못지않게 이 땅 위해 헌신

201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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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명 개화에 힘쓴 윌리엄 베어드]

언더우드·마포삼열 못지않게 이 땅 위해 헌신

<1> 베어드, 한국선교에 40년 몸바쳐

 <사진=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왼쪽)와 부인 애니 로리 애덤스는 한국교회의 신학과 교육, 문서선교분야에 혁혁한 공을 남겼다. 애니 사모는 ‘찬성가 번역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였다.>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배위량, 1862∼1931)는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조선인의 문명 개화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였다. 그는 1891년 미국 북장로교의 초기 선교사로 내한해 1931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조선에서의 40년 사역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선교 초기로 1891년부터 1896년까지다. 이 시기에 그는 부산과 대구에 선교지부와 한강 이남의 최초 교회인 초량교회를 설립하고 한반도 남부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두 번째 시기는 선교 중기로 1897년부터 1915년까지다. 이 시기 베어드는 조선 선교부의 교육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웠으며 1906년 감리교와 연합해 한국 최초의 근대대학인 숭실대학을 설립했다.

  세 번째 시기는 선교 후기로 1916년부터 1931년까지다. 베어드는 기존의 평양 숭실대를 폐교하고 서울에 새로운 대학, 곧 연희대학을 설립하자는 ‘대학문제’(1912∼1915)로 1916년 숭실의 교장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망 전까지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출판, 성경번역, 기독교 문서 번역 등 문서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베어드의 성장배경과 교육

 베어드는 한국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새뮤얼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처럼 복음전도와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와 성경번역에 있어서 탁월한 개척자였다. 특히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는 베어드만큼 탁월한 업적과 지대한 공헌을 이룬 내한 선교사도 드물었다. 그러기에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는 베어드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베어드의 선교 사역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사 속에서 그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베어드의 선교사역과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해 역사적으로 조명해보려고 한다.

 베어드는 1862년 6월 16일 미국의 인디애나 주 클락 카운티 찰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60년쯤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주한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언약파 가문의 후손이다. 언약파란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맹세한 ‘언약’에서 유래했다.

 조부인 존 베어드는 1810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온 후 1843년 인디애나 주 찰스타운 근처의 클락 카운티에 정착했다. 아버지 존 마틴 베어드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업인 방직업에 종사했다. 어머니 낸시 패리스 베어드는 남부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개혁교회 전통의 교인으로, 그녀의 가문은 종교적 신념으로 노예제를 반대해 북쪽 인디애나 주로 이주했다.

 베어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 낸시로부터 강한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는 자녀들을 엄격한 개혁교회 전통의 신앙으로 양육했다. 베어드는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찰스타운의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베어드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카운티의 공립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 외에 다른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베어드는 그보다 11살 위인 형 존 베어드가 마련해주는 학비로 하노버대학교와 맥코믹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선교사로의 입국

 베어드는 1888년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5월 뉴알바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이유로 곧바로 해외선교사로 나갈 수 없었고, 1890년 콜로라도 주 델노르트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에 초빙돼 목회 사역을 담당했다. 동시에 그는 멕시코와 스페인 계통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미션스쿨인 델노르트대학의 학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 무렵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의 형이자, 타자기 회사 사장이었던 존 언더우드가 한국에 갈 선교사의 봉급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서울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사역하던 마포삼열은 이 소식을 듣고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본부와 베어드에게 편지를 썼고, 선교본부는 1890년 여름 베어드를 한국 선교사로 지명했다. 북장로교 선교본부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받은 베어드는 곧 델노르트대학 학장직을 사임하고, 그해 12월 18일 하노버대학의 동료인 애덤스 집안의 애니와 결혼, 그날로 한국을 향한 배에 올랐다. 한 달 이상의 항해 끝에 이듬해인 1891년 1월 29일 부산을 거쳐, 드디어 2월 2일 제물포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어드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그가 수학한 맥코믹신학교의 학풍 때문이었다. 원래 맥코믹신학교는 목회자와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설립돼 종교개혁적 복음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원리에 기반한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신학교는 19세기 DL 무디의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SVM)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어드는 학생자원운동과 해외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에 적극 참여했고,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결단할 수 있었다.

 베어드 선교사 내한의 결정적 동기는 맥코믹신학교 동기생 마포삼열(1889년)의 권유였다. 맥코믹 졸업생으로 먼저 내한한 기포드(1888년)와 마포삼열은 한국으로 선교사 추가 파송이 가능해지자 베어드를 선교본부에 추천했고, 베어드를 설득해 내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훗날 이 세 사람은 한국 장로교의 형성과 발전을 주도했으며, 한국교회 내에 ‘맥코믹 학파’를 형성해 개혁주의와 성령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장로교 신학을 세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베어드의 학원선교와 문서선교사역은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명배 교수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본 기사는 국민일보 3월 28일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가기

홍보팀 (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