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명 개화에 힘쓴 윌리엄 베어드]
민족지도자 양성·장로교 신학 정립 ‘빛나는 공로’
<6·끝>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윌리엄 베어드는 구한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해 40년 동안 이 땅의 복음전도와 문명개화를 위해 헌신했다. 1891년 서울에 도착한 후 1896년까지 부산, 대구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선교와 교육에 종사했다.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워 교육사역을 시작했고 1906년 숭실대학을 설립해 한국최초의 근대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1916년 숭실대 교장직을 사임한 뒤에는 1931년 사망하기까지 문서선교사역에 헌신했다. 베어드는 선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와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했으며, 한국장로교 신앙과 신학의 형성·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다
베어드가 1897년 조선선교부의 제안으로 입안한 ‘우리의 교육정책’은 미션스쿨의 목적을 토착교회의 설립과 그 지도자 양성에 두었다. 복음전도를 최고의 이상으로 하는 이 ‘교육정책’은 숭실중학과 숭실대학의 교육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됐다. 일찍이 수많은 숭실의 졸업생들이 목회자로 혹은 평신도 지도자로 복음전도 운동에 선구적으로 헌신해왔던 것은 베어드의 교육이념과 영향 때문이었다.
경술국치 이전 숭실대학 학생들은 졸업도 하기 전에 전도사 등 교회의 일꾼으로 불려갔다. 1909년에는 숭실대 기독교학생회가 김형재를 제주도에 파견해 우리나라 학생전도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09∼1911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전개되자 숭실중학과 숭실대학은 연합전도대를 조직, 전국 각지에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910년에는 조선장로교총회보다 먼저 중국에 손정도를, 1911년에는 일본에 박영일을 파송해 해외 선교활동의 첫 문을 열었다. 1913년 당시 대학과 중학의 학생 수는 모두 400여명이었는데 전교생 4분의 1이 복음전도운동에 참가했다.
베어드의 교육이념에 영향을 받은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해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가 됐다. 김선두 정인과 한경직 명신홍 강신명 김형모 안광국 신후식 방지일 이수연 박종순 등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냈다. 박형룡 정일선 김성락 박윤선 강태국 김양선 신태식 등도 교계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1954년 재건 후 숭실대는 1000명 이상의 목회자들을 배출해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처럼 졸업생들이 복음전도 운동에 헌신하고, 한국교회에 다수의 목회자들과 기독교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전파와 복음전도자 양성이라는 설립자 베어드의 교육이념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하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다
베어드는 1897년 ‘우리의 교육정책’에서 조선어로 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조선어 교육정책은 일제하 숭실인들에게 민족의식과 국가의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숭실을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숭실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105인 사건에는 교장 베어드를 비롯해 교사 마포삼열, 스왈렌, 번하우젤, 맥큔과 다수의 선교사들이 연루됐다. 1917년에는 조선국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1918년 일본 경찰에 조직이 적발됐다. 당시 평안남도 경무부장은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숭실을 ‘불온사상이 횡일(橫溢)하는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숭실중학 출신 선우혁은 서북지방의 3·1 독립운동을 준비시켰으며, 졸업생 박희도와 김창준은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울의 3·1운동 계획에 참여했다. 당시 숭실대 재학생들은 평양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마포삼열을 비롯한 교사들은 시위 주동자들을 숨겨주는 등 만세운동을 도왔다.
1920년대 숭실대학은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합법적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농과강습소를 설치해 장로교총회 농촌부와 연계해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만식의 영향을 받은 정인과 배민수, 4대 교장 맥큔은 총회 농촌부의 부장과 총무, 서기, 회계의 주요 임원을 맡아 농촌운동을 주도했다. 일제하 민족운동의 근저에는 베어드의 토착적 기독교 교육이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 형성 주도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에 급성장했다. 여기에는 네비우스 선교방법론과 선교사들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앙의 영향이 컸다. 특히 미국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의 큰 역할을 했다. 1830년 시작된 이 신학교는 철저한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 청교도적 경건성 그리고 불굴의 기상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그 훈련과정으로 삼았다. 맥코믹의 신학적 학풍의 영향을 받은 맥코믹 출신 선교사는 한국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어드는 1916년 이후 문서선교사역에 종사하면서 한국장로교회 신학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세계교회의 동향과 신학의 흐름을 한국교회에 소개했고 보수적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계열의 기독교 신앙 혹은 신학서적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라는 이름으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그는 장로교 신학 전통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제시했다. 오늘날 다수의 한국교회가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전통을 견지하는 것은 베어드의 문서선교사역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베어드는 복음전도와 기독교 교육, 문서선교 사역에 있어 한국선교의 개척자였으며, 언더우드 및 마포삼열과 나란히 견줄만한 선교사였다. 특히 기독교교육을 통한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민족지도자 배출은 어느 내한 선교사도 따라 갈 수 없는 베어드 선교사만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김명배 교수
◇약력=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본 기사는 국민일보 5월 2일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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