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 법학과 56학번으로 졸업하신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숭실대학교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감개무량합니다. 곧 90세를 바라보며, 오랜 세월동안 숭실대학교와 저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며 걸음마다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입학은 영락교회에서 하였으나, 이듬해 상도동 골짜기 황무지에서 서울숭실의 첫발을 내디딘 그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까지 마음에 새겨져 있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도동 골짜기에 훌륭한 전통을 가진 평양 숭실대학교 서울숭실의 첫 모습은 석조건물 하나와 작은 기숙사 한 동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초라하게 보였던 학교의 첫 모습은 걱정 반, 실망 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예수 믿는 학교에 가라고 하셨고, 가정 형편상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가야 했기에 별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면서, 비록 황무지 위에 세워진 본 건물 하나와 기숙사밖에 없는 학교였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기독교 바탕이었고, 교수진 모두가 숭실과 관계 있는 훌륭한 분들이면서 당시 학문 분야에서도 인정받는 쟁쟁하신 분들로 구성된 것을 보고는 실망과 걱정이 점점 사라지면서 마음에 긍지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꿈과 포부도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6.25 전쟁 직후 우리가 처한 사회 형편은 모든 것이 가난하고 혼란스러우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가지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1교시를 마치고 드렸던 채플은 젊은이들에게 비록 폐허와 잿더미 위에서라도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학생 각자에게 목표를 가지게 하였으며, 고통 속에서도 생기를 넣어 주는 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교수님과 목사님들은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을 해주셨고, 자식과 동생 같은 학생들에게 따뜻한 말씀으로 인생 길에 빛이 되고, 보배 같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저도 그때 들은 말씀들이 삶의 지표가 되었고, 고난이 닥칠 때마다 인내와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숭실의 채플이 혼탁한 이 시대에 학생들에게 진리의 등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숙사 생활은 참으로 많은 재미와 기쁨을 주었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때 기숙사는 야산 기슭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특히 방학 때 학생들이 귀가하면 조용하고 적막한 분위기까지 돌아 새들이 모여들어 지저귀고, 산토끼들까지 뛰어다니는 정겹고 평화로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학교 앞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고대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50년대 후반에는 학교 옆으로 복개되지 않은 개천이 흐르고, 버스 정거장으로부터 기숙사까지는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기숙사 생활은 재미있고 즐거운 곳이기도 하며, 낭만과 꿈을 구며 미래의 삶을 이리저리 그려보기도 하는 보금자리였습니다.
졸업 이후 숭실대학교를 다시 방문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만일 방문하셨다면, 예전에 다니실 때와 비교해 어떤 변화가 느껴지셨나요? 그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불행히도 모교를 자주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70여 년 동 안 두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는데, 첫 번째는 이삼열 철학과 교수님이 계실 때였고, 두 번째는 지난 2022년 9월에 교목 실을 방문한 것입니다. 두 번 모두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둘러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상도동 캠퍼스에 들어섰을 때는 석조건물 하나와 작은 기숙사 한 채밖에 없었으니, 오늘날의 모습과는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그동안 숭실의 대내외적인 성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숭실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피와 땀으로 형성된 결정체라 생각합니다. 숭실대학교가 한국의 진리와 봉사 정신으로 참 사람을 양성하는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하고,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기를 소망합니다.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본사의 초청 덕분입니다. 1966년 페어차일드 회사가 한국에 반도체 조립 회사를 설립하였고, 저는 1967년 2월 관리 주임으로 입사해 생산부장과 공장장을 거쳐 대표이사 사장직에 올라갔습니다. 한국 공장의 실적이 우수하여 본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82년경 본사 내 군사/의료용 반도체 생산라인에 품질 문제가 발생해, 펜타곤으로부터 생산 중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본사는 저에게 생산라인의 재가동과 운영을 맡기기 위해 저를 미국으로 초청하였고, 1983년 3월 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2022년 교목실 발전기금을 기부하셨다고 알고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저는 해방을 중국에서 맞이했습니다. 이후 무정부 상태의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저희 가족은 이북 만포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의 압박으로 어머니 고향 순천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심해 지면서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첫 3-4년은 신문 팔이를 하며 고난을 겪은 어려운 고학생활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숭실대학교에 진학하였고,숭실에서 배운 가르침 덕분에 사회로 나설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에 제 인생은 힘든 여정 속에서도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작은 도움이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번 기부는 제 인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이 기부금이 숭실대학교 복음화에 사용되었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숭실의 채플은 폐허와 잿더미 위에서도 용기와 힘을 주었고, 학생들에게 목표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귀한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기부금이 숭실대학교의 복음화와 소그룹 채플 활동에 쓰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숭실대학교의 동문들과 재학생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50,60년대와 오늘날을 비교하면, 당시의 삶을 경험해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제 성장과 사회적 변화는 엄청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큰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와 자율주행 자동차, 드론의 일반화는 생활의 큰 변화를 가져올것 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 문제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참 사람, 바른 사람이 부족합니다. 이는 교육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참 사람을 양성해야 합니다. 숭실대학교가 이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기뻤던 점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에서 숭실대 전자공학과 졸업생들을 채용했을 때, 모두가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참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 한국 사회에 필요합니다. 숭실대학교가 이러한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와 세계에 기여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