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으로부터 온 첫번째 편지 (홍주성 국문13 어머니)

2014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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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여왕으로부터 도착한 따뜻한 편지"
 홍주성 학생(국문13) 어머니의 회신

[인터뷰송혜수 홍보팀 학생기자(문예창작 09), hyesoo11011@daum.net]


 * 아래는 베어드학부대학이 올 초 발간한 ‘2013학년도 부모님 평전 모음집’에 실린
홍주성(국문 13) 학생 글의 주인공 어머니 김정희씨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관련기사 [부모님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 보기


 ?犢之情(지독지정),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가족 관계나 의미가 퇴색됐다 할지라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뛰어넘는 ‘참 사랑’이 또 있을까. 한없이 받기만 함이 송구하여 써내려 간 평전에 부모님은 또 다시 무한한 애정을 담아 답장을 띄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주성아. 네가 쓴 평전은 잘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엄마를 너무나 미화시켜 주고(웃음) 긍정적으로 평을 해주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롭기도 했단다. 어느 새 훌쩍 자란 아들의 눈으로 바라 본 내 자신을 볼 수 있어서. 그래서 오늘은 너희에게 어렴풋이 들려주던 이 엄마의 얘기를 해볼까 한단다.

대구 소녀, 스튜어디스가 되다

 첫째가 딸이었던지라 내심 둘째는 아들을 바라셨던 네 외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크게 실망을 하시고 가출을 하셨지. 물론 하루 만에 돌아오셨지만. 처음엔 그러셔도 지금까지 내가 형제들 그 누구보다 총애를 받은 이유는 네 할아버지와 가장 닮은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20대 시절은 아마 너와 무척 비슷할 것 같구나.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때로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 그러다 대학 3학년 시절, 우연히 스튜어디스 채용 광고를 보고 지원해 보기로 마음먹었단다. 시험과 면접을 치르기 위해 처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해. 운이 좋게도 최종까지 올라 합격을 하고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을까 했던 기대는 현실이 되어 1년 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지. 하지만 기쁨과 동시에 무척 힘든 시간이기도 했단다.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 홀로 지내고 입사 교육과정을 받으면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몸이 많이 아팠었어. 결국 스튜어디스 교육 수료를 일주일 앞두고 나는 쓰러졌고 후에 결핵성 늑막염이란 진단을 받게 되었단다. 치료를 위해 낙향하여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마친 후 다시 재교육에 들어가 어렵게 스튜어디스가 될 수 있었던 거야.

 아마 그때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택했다면 네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같은 회사 사원으로 너희 아버지를 만나 사내 연애도 하고 몇 년 뒤 결혼을 했단다. 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런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점은 좋았지만 그간의 힘듦 때문이었는지 결혼 후 난 일을 그만두었지. 시간이 지나 비행을 계속 하는 동기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너희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행복함과는 맞바꿀 수 없었어.  

 타국에서의 생활

 아들아. 너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것이 있단다. 해외 주재 근무가 잦았던 너희 아버지로 인해 우리 가족이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 인도네시아 등 타지 생활을 해야 했잖니. 한창 사춘기였을 나이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나름 힘들게 버텼을 너를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아파 오는구나. 넌 기억 못 할 거야. 우리 가족이 연고지 없는 강원도로 떠나기 전 네가 제일 좋은 유치원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 새벽같이 나가 엄마들 틈에서 줄을 섰었던 일. 널 그곳에 보내는 것으로 나의 미안함을 달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엄마는 선천적인 성격 탓인지, 젊은 시절 직업상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녀서 그런지 어딜 가든 적응을 잘 했지만 어린 너희가 감당하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영어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말하는 너를 볼 때 대견하기도 했단다.  

 2년 반의 시간을 타국에서 보내고 서울로 귀국 했을 때, 또 다시 문화 차이로 힘들어하는 너를 보면서 난 큰 가슴앓이를 했지. 그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묵묵히 기도하며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잘 버텨 준 너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엄마의 역할

 네가 표현한 대로 나는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 살가운 스킨십이 있는 엄마도 아닐뿐더러 너희에게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익숙한 편이잖니. 그렇다고 내가 어느 순간 돌변해서 안하던 다정함을 보일 수도 없는 것이고.(웃음) 하지만 너희에게 힘든 순간이 올 때 함께 감정에 휘둘려 쓰러지기보다는 평상시처럼 굳건히 너희 곁에서 “괜찮아! 잘 될 거야.”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위로자가 내 역할이라고 본단다. 또 나를 너무 차가운 사람으로만 보지 말아 다오. 너희 외할아버지를 닮아 가끔은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는 나란다(^-^).

 주성이 네게 큰 것을 바라지 않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부담은 주지 않으려 해. 다만 지금처럼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잘 자랐으면 좋겠고 개인적인 행복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그 행복을 전달하는 사람이면 이 엄마는 족할 것 같구나. 스스로의 역할을 책임감 있게 감당 해내면서. 이제는 너희 둘 모두 성인이 되어 나의 여가 시간이 많아진 요즘인데 오히려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오로지 그 전에는 자식 뒷바라지에만 몰두에서인가. 조금씩 진행해야겠구나. 앞으로는 너희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 보면서 말이야.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만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해주어서, 잠시 잊고 있던 ‘김정희’를 꺼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 그럼 오늘 하루도 보람차게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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