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태극전사"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최진철 동문(행정 90)과 만나다
[인터뷰: 송혜수 홍보팀 학생기자(문예창작 09), hyesoo11011@daum.net]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태양보다 붉고 뜨거웠다. 2006년 6월, 여전히 뜨거웠던 우리는 그늘과 위로를 배웠다. 그리고 그도 함께 있었다. 대한민국 그라운드의 중앙을 책임지던 축구 선수 이자 이제는 ‘레전드 센터백’이 되어 U-16 청소년대표팀 감독으로 자리한 최진철 동문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그의 진솔한 축구이야기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람 ‘최진철’을 함께 만나보자.
보고싶었습니다
공식 은퇴 후, 그를 자주 볼 수 없었다. 4강 신화의 추억만큼이나 그리워했을 팬들을 대신해 근황에 대해 물었다. “현재는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에 속해 임하면서 16세 이하 유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있고요. 2015 FIFA U-17 월드컵의 아시아 예선을 겸하게 될 AFC U-16 챔피언십 참가를 위해 소집 훈련 중에 있습니다. 그 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187cm의 장신, 체격 조건이 좋은 유럽 선수들에 맞서 몸싸움을 벌이던 선수답게 여전히 위엄 있고 이제는 연륜마저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하지만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땐 그 어떠한 현역 선수보다 빛났다. 언제부터 축구는 그를 빛나게 했을까?
제주는 내 고향
최 동문의 프로필에는 전남 진도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프로축구 전북 현대팀 소속으로 오랜 시간 뛰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전북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유년 시절 대부분을 차지하는 배경은 사실 제주도이다. “5살 때 가족이 제주도로 이사를 갔어요. 진도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기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누가 고향을 물어보면 전 제주도라고 해요. 그때는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가 없었기 때문에 애들끼리 골목에서 공차고 노는 게 다였죠.”
그렇게 공놀이에 재미 정도로만 느끼던 최 동문은 11살 때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다. “축구부에 들어가서도 처음부터 축구 선수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어요. 국가대표팀이 출전한 동아시아대회와 같은 경기 중계를 보면서 자연스레 꿈을 키우게 되었죠. 아무래도 신체 조건이 다른 선수들보다 좋았고 교실보다는 운동장이 좋았기 때문에 축구를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숭실대학교에서 수비수로 태어나다
중앙수비수의 역할을 잘해낸 그였지만 수비수를 달게 된 것은 대학교에 오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그는 공격수였다. “대학교 입학식 바로 전에 훈련을 하는데, 당시 감독님께서 포지션을 바꿔 수비수에 두셨어요. 익숙하지 않았던 위치였기 때문에 감독님께 굉장히 혼이 났는데,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는지 도망을 가버렸어요. 하루 만에 누나한테 붙잡혀 오긴 했지만 들어올 때 다짐을 했죠. ‘축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면 끝까지 한번 해보자.’라고. 후에 기본적인 움직임은 알았기 때문에 커버링이라든지, 몸에 익히는 과정을 겪으면서 수비수로서 제 포지션을 가질 수 있었어요. 대신 훈련하면서 욕도 많이 먹었죠.(웃음)”
중앙 수비수로 자리를 굳힌 그는 대학 3학년 시절, 추계대학연맹전에서 숭실대를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숭실대로서는 10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본 것이다.
체육학과가 없었던 당시에 축구 특기생으로 뽑혀 행정학으로 입학한 최 동문. 첫 수업 때 여학우가 단 한명만 있는 것을 보고 실망감이 컸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운동선수로 온 것이었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평범한 대학생활은 누릴 수 없었다. “3학년 말부터 대표이진으로 동아시아 대회를 나가고 실업팀과 대학팀 간의 경기, 대통령배 등 외부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4학년 때는 3개월 정도만 학교에 있었던 기억이 나요. 남들처럼 대학생활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대신 그때 저를 많이 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추억이죠.”
대학 졸업을 하고 상무팀에 소속되어 의무를 마치고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드래프트 1순위로 전북에 프로 입단을 하게 되었다. 국가대표팀(A팀)으로 발탁된 것은 93년 12월이다.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하지만 상처도 컸다. “처음엔 TV에서만 보던 하늘같은 선배 선수들과 함께 뛴다는 것에 주눅이 들어 긴장하고 실력 발휘를 못하던 때가 많았어요. 결국 최종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상무에 있다가 의무를 마친 뒤, 전북 현대에서 뛰었는데, ‘아, 이제 월드컵과 나는 인연이 없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 후에도 감독님들마다 바라보시는 선입관에 힘들어하고 여러 가지 상처를 겪으면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감독이 되고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후배를 양성할 때도 도움이 되는 그때였던 것 같아요.”
세 번 끝에 찾아 온 월드컵, 2002
열악한 상황에서도 다시금 일어나는 자세를 가진 최 동문. 그런 최 동문을 파란 눈의 한 감독이 눈여겨보게 된다. 바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히딩크 감독은 최 동문을 두고 “왜 여태껏 이런 선수를 뽑지 않았느냐”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k-리그전을 끝내고 전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대표팀에 합류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대표팀에 가서 좋지 않은 기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여겨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어요. 결국 합류하게 되었죠.” 이후 세네갈, 크로아티아, 미국과의 평가전 모두 출장하면서 최종 엔트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연습을 할 때 항상 노란 조끼를 주는 거예요.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다가 계속 노란 조끼를 받게 되니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되었죠. 월드컵에 나가리라는.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생겨 저 또한 모든 것을 보여주려 노력했고 감독님께서 저의 투지를 높게 평가해주셨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잊지 못할 꿈이자 기회였죠.”
최강의 쓰리백. 홍명보, 김태형, 최진철. 이 셋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명콤비를 보여준 것에는 그들의 호흡이 있었다. “저는 딱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명보 형이에요. 선수로서나 축구인으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명보 형이 전체적인 컨트롤을 하면 태형 형이 적극적으로 수비에 임하고 전 그 둘 믿고 따라갔어요. 저희 셋이 나이 또래가 비슷했고 호흡을 맞춰 조직력을 구축해 나가는 데 노력을 많이 했었죠. 그 둘을 만나게 된 것 또한 저에겐 행운이네요.”
굿바이 ‘선수’ 최진철, 기대되는 ‘감독’ 최진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그는 ‘노장 투혼’을 발휘했다. 독일 월드컵 전에 은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본프레러 감독의 권유로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었다. 토고와의 경기에서 아데바요르의 발을 묶었고 스위스 전에서는 센데로스를 막기 위한 충돌로 인해 붕대를 감고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 모습은 많은 이들에 가슴에 남아 있다. “양파망이요?(웃음) 저는 100장 찍히면 건질 사진은 하나 정도밖에 없어요. 오죽하면 기자들이 쓸 사진이 없으면 다 그런 사진뿐이겠어요.” 농담을 던지기도 한 그였다. 2008년 공식 은퇴를 끝으로 우리는 ‘선수’ 최진철을 떠나보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 냈던 그였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그런 그가 지도자로서의 길을 가게 됐다.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두고 한편에서는 수비수 출신의 감독이기 때문에 수비형 축구를 선보이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의 생각은 어떨까. “저는 수비형 축구, 공격형 축구 어느 한쪽만 두고 하지 않으려고 해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학 오기 전까지 스트라이커로도 뛰었고 사실 수비가 축구의 기본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저의 이러한 경력이 아마 선수들에게 다각도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축구는 결국 패스와 컨트롤의 경기에요. 빠른 움직임으로 빈 공간을 활용하여 빠르게 골까지 유도할 것이냐에 초점을 두고 선수들과 훈련에 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2학기부터는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기초적인 부분 또한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유소년 선수들을 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잘못 들인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프로 축구에 가서도 똑같은 패턴을 유지하더라고요. 이에 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람’ 최진철
2002년의 주역들이 예능 및 방송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최 동문은 성격상 방송 활동이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큰 키와 진중한 모습으로 인해 다가가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가 보는 자신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제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니고 방송에 끼가 있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보시는 부분이 많다고 봐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선수 시절에는 상대 선수에 맞서 위협할 때나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지도할 때는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는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조금 고치려고 해요. 농담도 하고 그라운드 밖에서는 선수들에게 친근한 감독이 되려고 장난도 치죠.”
1남 1녀를 둔 최 동문에게서도 자식을 향한 아빠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영락없는 딸바보임을 인정했다. “딸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저를 더 닮은 것 같아요. 큰 키까지 닮아서 걱정이긴 한데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아이들 어릴 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제가 가끔 TV에 나오면 그걸 다운받아서 보여주고 하는 게 고맙기도 하고 그렇죠.”
두 번의 월드컵과 감독으로까지 오게 되면서 아내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었다. “아내와의 만남은 대학 때였어요. 친구가 생일 파티에 데려갔는데 그때 아내를 처음 보고 마음에 들었죠. 3살 연상이었던 아내는 제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기가 생겨서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도 못 갔어요. 아내한테 책잡히는 부분이기도 한데(웃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죠. 본인도 힘들었는지 아들이 축구 선수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말릴 거래요. 둘 뒷바라지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끝으로 그의 목표, 꿈을 물었다. “감독으로서는 내년에 있을 U-17 월드컵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이고요. 9월에 있는 챔피언십에서 4위안에 들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에 열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에게도 주입을 시키고 있어요.(웃음) ‘우리의 목표는 월드컵이다. 큰 무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감을 가지고 뛰라!’라고요. 개인적인 목표는 청소년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단계별로 감독으로서 성장을 겪어보고 싶어요. 나이가 들고서는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제 경험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 현재 목표입니다.”
누구보다 숭실을 사랑하는 최 동문. 부탁의 말도 남겼다.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에게는 학교에서 주는 지원 여하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에요. 재학생들 또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신다면 선수들이 더 힘을 내서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4년 6월, 전 세계가 다시 축구공 앞에 모였다. 태극 전사에서 이제는 그 또한 5천만 붉은 악마 중 한 사람이 되어 경기를 지켜보고 응원할 것이다. 세 번의 좌절 끝 찾아 온 월드컵을 맛 본 그였기에 얼마나 그 무대가 소중하고 귀한지를 몸소 알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역사에 남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가 흘린 그라운드에서의 피와 땀방울이 훗날 미래 대한민국 축구의 앞날에는 선수들의 투지와 열정으로 다시금 태어나길 소망한다. 고맙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태극전사 최진철!
* 최진철 동문(행정 90)은 94년 숭실대학교 행정학 졸업 후 동대학원 생활체육학 석사를 마쳤고 본교에서 생활체육학과 전임강사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93년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발탁을 시작으로 전북 현대 모터스,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중앙수비수로서 활약하며 공헌하였고 2008년 공식 은퇴를 선었했다. 현재는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 및 U-16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며 미래 대한민국 축구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