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 왜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 말하는가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사학 85)동문
그의 프로필을 보고 있으면 ‘한 길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발간된 그의 저서는 무려 27권. 기자가 만나본 그는 역사 평론가로서의 저력도 저력이었지만 숭실의 동문으로서 숭실의 정체성을 올곧게 지켜온 그 정신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한 길’은 그가 역사평론가로 살아온 삶과 더불어 그의 정신이기도 했다. 더불어 숭실인이라는 자부심이 부족한 우리에게 그와의 만남은, 같은 숭실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에 대한 성찰을 갖게 한 시간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것
학창시절, 가세가 어려웠던 그는 가족들과 월세방에 살았단다. 당시 주인집 서재에 꽂혀 있던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을 읽었고, 이것이 그가 처음 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선택해야겠다고 느낀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이후 그는 학사, 석사를 모두 본교에서 거쳐 사회무장단체인 동북항일연구로 또다시 숭실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됐다. 그리고 오로지 한 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현재 저명한 역사평론가로 인정받고 있다.그가 펴내는 수많은 역사서들은 쉽고 재미있어 대중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사관에 대한 직접 제시는 피하돼 각 시대에서 발굴된 1차사료를 가지고 철저한 문헌 연구와 고증, 역사적 상상력이 어우러져 친근하고도 무게 있는 이야기로 역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그는 독자를 끄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 도전
그는 우리사회 역사를 바라보는 주류 기득권과 다른 방식, 즉 역사를 축소해 바라보는 실증주의 사관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사관을 간략히 말하자면 ‘인조반정’과 ‘노론’에 대한 해석인데, 그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집권세력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즉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은 남인과 소론이 주도한 독립운동일 뿐이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과 그의 후신인 노론은 일제의 친일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그간 실증주의 사학에 있어 대단한 반기였다. 더불어 그의 저서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는 ‘정조 독살설’에 대한 역사 해석에 대한 독점권을 타파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옛 사관들이 쓴 내용을 보면 조선 초기는 비분강개하면서도 일반관점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후기로 갈수록 당파 색깔이 뚜렷해지면서 수정실록이 많이 나왔다. 후세에서는 한쪽 시각만 남는 것보다 이렇게 사관마다 다른 관점이 제시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또 그는 “이런 걸 보면서 글을 쓸 때에도 스스로 공평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어떻게 보면 한쪽 시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답답할 때도 있지만 집필한 책을 오랜 세월 두고 볼 때 그렇게 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그가 왜 그가 이토록 사료를 통한 객관적 근거에 몰두하는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천고’는 곧 나의 정신
그에게 실례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역사 사관의 모토가 되는 역사가를 물었다. 그는 우선, 이미 2100여년 전 거대 중국 땅을 사전답사하여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을 꼽았다. 이어 우리나라 역사학자인 김일손 선생과 백암 박은식 선생, 그 중 가장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함석헌 선생을 넌지시 건냈다.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적 바탕에 뿌리를 두고 유교에 밝았으며 노자와 장자와 같은 기본 학문을 갖춰 유연성 있게 사관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 동양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점에 일정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 동문의 호는 사마천의 ‘천과’ 반고의 ‘고’를 딴 ‘천고’였다. 처음 이 호를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역사관을 ‘천고’처럼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서 겸허히 호를 받아들였다는 에피소드도 살짝 곁들었다. 비록 그는 “호가 부담스럽다”했지만, 호가 지닌 의미 그대로 자신의 사관을 높고 곧게 펼치고 있었기에 그가 지닌 호의 의미는 더욱 의미깊었다.
숭실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숭실의 모습은 곧 그가 지향하는 역사관과도 일맥상통했다. 숭실을 두고 “한국 최초의 대학이며, 일제에 맞서 폐교까지 감행한 정체성을 지닌 대학”이라고 말하던 그가 숭실을 빗대어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은 출판사에서 그가 저술한 책을 발간할 당시 출신학교의 이름을 빼려고 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 출판사에 그는 더욱 강경하게 학교의 이름을 꼭 넣어달라고 전했단다. “일제에 맞서 폐교를 감행한 정신을 지닌 학교는 우리뿐이었다. 지금의 메이저 대학이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대사 전개 자체에서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며 이런 이유로 오히려 사학계의 비주류였던 숭실의 정체성을 한 번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모든 곳에 항상 ‘숭실대’라는 이름을 나란히 새긴다. 본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까지 이수한 숭실인이어서가 아니라 ‘숭실’의 정신은 곧 그가 지향하는 역사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숭실 내부에서 주류가 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현대사의 외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하려는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가 왜 숭실을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 했는지 그제서야 그 의미를 아로새길 수 있었다.
“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다”
“숭실 출신의 동문들을 보면 사회 곳곳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숭실의 ‘실’은 실력과 더불어 노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실력이 뒷받침 될 때 그것은 곧 자부심이 된다”던 그는 스스로를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 칭한다.
사학과 같은 보수적인 학문세계에서는 비주류처럼 보였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데 그것을 거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관점을 유지했다는 말에 의아하기만 했다. 비주류로서 걸어온 그의 길이 녹록지만은 않았을 것이 짐작됐기 때문이다. 허나 “실력이 곧 자부심이 된다”던 그의 말처럼, 그는 숭실의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고 학벌과 시대환경과 같은 외적인 요건보다 내실로 그 만의 위치를 견고기 닦아왔다. 비주류로 살아가는 그의 삶이 그래서 당당하기만 한 것도 이 같은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면의 가치에 귀기울여야
“끼니를 걱정하던 부모님 세대에 비교해보면, 요즘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행복도 풍족한게 아니다라는 점은 생각봐야한다”며 “내면의 가치에 집중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꾸준히 쌓아가는 인간적 풍모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한 그였다. 그의 조언은 본보를 위해서도,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게 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무수히 만난 사회 저명인사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인재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본보에 대해서는, 그가 제시한 방향을 학생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신문이 돼야 할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그는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해, 역사와 미래를 잇는 우리시대 몇 안되는 인물이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진정한 삶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올곧은 정신의 힘이었다. 숭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히 ‘실력’으로 맞설 수 있는 자심감이 숭실인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건 기자의 소망만이 아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