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가락, 그리고 기계적인 사운드와 자유로운 음악의 대명사인 힙합. 이 둘이 만나면 어떨까. 2000년 국악과 힙합이 결합된 첫 싱글 앨범을 가지고 국내 힙합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원썬(One Sun, 본명:김선일 기계공학과 98). 그가 7년 만에 첫 정규앨범 ‘One'을 발매했다. 매일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비슷비슷한 음악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태양같은’ 청년 원썬을 만났다.
극과 극인 음악 간의 ‘극적인’ 어울림
힙합은 자유로운 음악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은 많지 않다. 힙합가수인 원썬. 그는 극과 극이라고 볼 수 있는 국악과 힙합간의 ‘극적인’ 어울림을 발견했다.
“물론 힙합이 서양 쪽의 문화이긴 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어요. 국악. 사실 잘 몰라요.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모르면서 아는 것’, 그것이 제가 가진 힙합의 힘이에요.”
그는 2000년에 처음 싱글 앨범을 냈을 때부터 국악과 힙합을 접목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국악인 황병기의 ‘아이보개’를 샘플링한 ‘서사’와 유럽 국제음악박람회에서 주목받은 ‘어부사’라는 곡을 들어보면 그의 진가가 환하게 드러난다.
또 그는 ‘두사부일체’, ‘굳세어라 금순아’, ‘홍반장’, ‘달마야 서울가자’ 등의 영화음악도 만들었다. 그리고 독립영화인 ‘제국’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음악감독까지 맡았다. 그의 폭넓은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국악계에서 그는 이미 반(半) 국악인, 작은 국악 ‘명인’이라 불린다. 그는 힙합 마니아들에게는 물론 국악계에서도 인정받은 뮤지션이다. 그에게 있어 국악은 잠시 지나치는 간이역이 아니라, 종착역 그 자체이다.
난 선비 집안의 딴따라다
그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각종 강연으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올 김용옥 씨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역사를 가르치는 김인중 교수(숭실대 사학과)이다. 동양 철학과 역사로 점철된 그의 집안 배경(?). 어쩌면 이것이 그의 음악에 영감을 불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강한 의구심에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작은 할아버지와는 별로 친하지 않아요. -_-;; 얘기할 기회도 거의 없고요. 그리고 아버지는 저를 포기하신지 오래됐습니다. 하하.”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가 아버지에 대해 서운한 기색 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음악을 하고 있는 ‘행복한 딴따라’가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었던 시기가 내게는 가장 소중했던 투자의 시간
그는 마이크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그는 그저 말만 많은 ‘샌님’이기보다 직접 부딪쳐서 깨닫는 경험주의자다. 그의 열정은 많은 경험들 속에서 무르익었다. 악기를 사기 위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음악을 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 서빙, 주유소, 공사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이다.
“월 10만 원짜리 방에서 980원 짜리 콩나물밥을 먹으면서 살았어요. 어떨 때는 정말 ‘이러다 얼어 죽는 거 아냐’하고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즐거우니까, 젊으니까 할 수 있었죠. 힘들었지만 그 시기가 제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자 투자였어요.”
가난했지만 자신의 꿈을 노래하던 그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하며 멋들어진 말들을 덧붙였다.
“다섯 단계를 한꺼번에 오르려고 하는 것보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겪는 고생들이 훗날 자신을 지탱해주는 밑거름이 된다고 믿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첫 발을 내딛는 겁니다.”
꿈은 ‘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갖기’ 위한 것이다
그는 ‘첫 발’을 이미 오래 전에 내딛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꿈을 위한 ‘비상한’ 비상을 준비한다. 요즘 날고 긴다는 톱가수들 마저 기피하는 앨범발매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올 여름쯤에 2집 앨범을 내고 싶어요. 이미 2, 3집 앨범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소스가 충분하거든요. 가수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앨범을 내는 것 외에는 다른 게 없어요. 그러니 음반은 쌓일수록 좋은 거죠.”
그의 창작욕구와 철학. 멋지다. 하지만 그를 키운 ‘힙합명문’ 숭실대에서의 10년 가까운 생활은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엔 아쉬움이 많아요. 음악을 한답시고 열심히 다니지 못해서 교수님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거든요. 하지만 잘(?)보여서 올 겨울 쯤엔 졸업하고 싶어요. 또 기회가 된다면 좀 더 깊이 있는 국악공부를 위해 대학원에도 가고 싶습니다.”
그는 단지 꿈을 ‘꾸기’만 하는 몽상가가 아니라 그 꿈을 ‘갖기’위해 노력하는 삶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욕심 뿐 아니라 학업에 대한 욕심, 바로 삶에 대한 욕심이었다.
“젊음을 바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원썬. 용기 있는 그가 아름답다. 태양이 하나이듯, 원썬도 하나이기를. 그가 말하는 ‘힙합명문’ 숭실대학교를 누구보다 밝게 빛내는 하나의 태양이 되기를 기대한다. 인터뷰 / 홍보팀(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