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부산방송총국 총국장 최석태 동문(법학 75)

2010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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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언론인을 만나다


최석태 동문 | KBS 부산방송총국 총국장, 법학 75


 


“기자로 살아가는 게, 어려운 일이긴 해도
한번쯤 해볼 만한 일이에요.
세상의 거대한 흐름을
체감하며 산다는 것도 그렇지만
변화의 핵심에 서 있을 수도 있지요.
기자는 무엇보다
자기성찰에 게으르면 안 됩니다.
그래야 정의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기사와 뉴스에 떳떳할 수 있으니까요.”


 


KBS 부산방송총국 총국장. 부산지역 KBS 방송을 총괄하고 울산지역국도 관리하는 자리. 350여 명의 직원을 아우르며 뉴스 아이템 선정부터 편성 프로그램 협의, 뉴스 브리핑 등 정신 없이 돌아가는 방송국의 하루하루에 중심을 잡아주는 자리이기에 누구보다 취재현장을 잘 알아야 하고, 조직관리에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 81년 KBS 공채 9기로 선발돼 당당히 숭실의 문을 나선 최석태 동문이 지난 9월 KBS 부산방송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기자생활 28년 만의 일이었다.


 


KBS의 기자로 살아온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의 책임감을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였다. 누군가의 정당한 주장을 진실하게 전달하려 노력했고, 취재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운 길이었다“뉴스가 나가면 피드백이 꽤 많습니다. 작은 의견부터 사회 구조적으로 아예 바뀌는 것도 많았고요. 제 보도 내용으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신경 쓰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취재원의 인권을 최대한 배려하려 노력했는데, 잘 지켜졌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기자로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사건사고 현장에서 보냈다. 1982년 의령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만취한 순경이 주민을 무차별 난사해 8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수습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서울 뉴스에 방송된 저의 첫 취재였습니다.”


 


같은 해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9년 동의대 사건 등 혼란과 혼동의 80년대를 보내오며 겪었던 사건마다 그는 ‘기자정신’으로 시대를 읽어내야 했고,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했다. 총국장으로 취임하기 직전까지는 매주 생방송으로 토론프로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경력을 쌓았다. 패널들보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찾아 준비해야 했는데, 5개 국어에 능통한 그의 실력이 큰 도움이 됐다.


 


대학시절부터 외국어 공부가 좋았다는 그는 영어와 중국어, 일어는 자유롭게 구사하고 독일어, 프랑스어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실력파다. 지금처럼 외국어 실력을 갖춘 직원들이 많지 않던 시절엔 일본 NHK 방송의 뉴스를 통으로 번역해야 했다. 단순히 외국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 좋았던 것보다는 국제 뉴스를 먼저, 생생히 접하면서 그만큼 더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섭렵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에겐 값진 일이었다. 총국장으로 성장하기까지 남다른 경쟁력을 키워준 하나의 무기인 셈이다.


 


“방송이 할 수 있는 많은 일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을 겁니다. 상생의 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총국장으로 있으면서 상생의 정신을 실천하는 방송환경, 프로그램, 보도에 열중하고 싶어요.”


 


취업대란을 이야기하는 요즘이지만 진정으로 원하고 찾는다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을 전하는 그는 특히 방송국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끈질기게 물어보고 파고드는 것이 필요해요. 선배들을 수소문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세요. 길은 그런 사람들에게 열리는 법입니다.” 30년 가까이 취재와 방송 현장을 온몸으로 달려온 대선배의 진지한 가르침이자 작은 상생의 메시지이다. 홍보팀(pr@ssu.ac.kr)


 


최석태 동문은…1981년 KBS 공채 9기로 입사하여 1982년 숭실대 졸업 후 줄곧 부산지역에서 보도기자로 활동해 왔다. 부산방송총국보도국장과 심의위원 등을 담당했으며, 취임 직전까지 1년 동안 쟁점토론 ‘이슈 앤 이슈’의 사회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