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 동문, 장학금 약 32만 불 (3억 7천여 만원) 기부

2018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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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 동문, 장학금 약 32만 불 (3억 7천여 만원) 기부

“가정형편 어려운 학생 위해 써 달라”…‘이도영 장학기금’ 조성

 미국 버지니아 린치버그에 거주하고 있는 이도영 동문(81)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 달라”며 미화 약 73,340불 (7천 8백여 만원)을 본교에 송금해 왔다. 그동안 미주동문회를 통해 학교발전기금을 출연해왔던 이 동문은 숭실의 후배들을 위해 장학기금을 조성하고자 결심하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보내온 장학금에 더하여 올해 5월 초에 7천 8백여 만원의 장학금을 추가로 보내와 기부 장학금 총액이 3억 7천여 만원에 달한 것이다.

 (2013년 3월 본교를 찾을 당시의 이도영 동문)

 본교 영어영문학과 58학번인 이 동문은 아홉 살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열 살 무렵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족들에게는 곧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3·8선 근처 장산곶 사람들과 백령도에서 함대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해 피난민 수용소에서 부두 노동일을 하며 지내다 서울로 오게 되었다.

 배움에 대한 갈급함으로 이 동문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신문 배달과 동대문 경전차고에서 야간에 청소까지 해가며 숭실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에 숭실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생활고 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이었고, 30대까지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보냈었다고 한다. 서러운 마음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목 놓아 운 적도 많았었는데 학교의 친구들과 교수님들이 그를 지탱해주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목표가 뚜렷했었던 이 동문은 196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3년 후에 숭실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부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지만 혈육에 대한 그리움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없앨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유학 시험을 치러 1971년 도미하여 특수교육학 석사와 교원자격증을 취득했다.

 1973년부터 버지니아 주 정부 정신건강국에서 심신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부문 담당자로 일했던 이 동문의 40여 년의 미국 생활은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다. 3개 이상의 석사학위를 취득할 정도의 학점을 이수한 그에게 동료들은 ‘영원한 학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직하고 검소하게 살려는 생활신조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이 동문은 1977년에 큰 수술을 받으면서도 직장에서는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2007년에 버지니아 주 정부 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하였다.

 이 동문의 모교사랑 및 후배사랑을 기리기 위해 본교는 2015년 5월, 벤처관 309호 대형 강의실을 ‘이도영 강의실’로 네이밍하는 헌정식을 갖기도 하였다. 실향민의 삶을 거쳐 미국 사회에 정착하기까지 가강 깊은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발견한 이 동문은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평범한 생각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냥 있을 수 없어 후배들에게 장학금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기부자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본교는 ‘이도영 장학기금’을 조성하였고 2018학년도 2학기부터 저소득층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이도영 강의실’ 앞에서 홍보팀 학생기자단 ‘프레슈’와 함께)

현재 투병 중인 이 동문이 빠르게 쾌유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모교 숭실 캠퍼스를 다시 찾고 후배들과 대화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해본다.

홍보팀 (pr@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