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글로벌 명문을 향한 캠퍼스 혁명 숭실대 편

2007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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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명문을 향한 캠퍼스 혁명]


‘벤처의 요람’ 숭실대, IT인재 양성 선두주자 1400억 투자 ‘숭실 2010 프로젝트’ 가동, BTO기숙사 등 신축… 최근 우수학생 몰려








▲ 숭실대 정보통신전자공학부의 실습 모습.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많이 변했네.” 요즘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숭실대 캠퍼스를 오랜만에 가본 사람은 이런 탄성을 자아낸다. 새 건물이 잇달아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재작년 9월에 오픈한 형남공학관이 변화의 신호탄 격이다. 지상 15층, 지하 2층, 건평 약 1만평 규모의 이 건물은 공학 교육에 필요한 각종 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오는 7월에는 건평 7762평 규모의 조만식기념관과 1034평 규모의 웨스트민스트홀이 문을 연다. 조만식기념관에는 인문·사회 계열 강의동과 연구실이, 웨스트민스트홀에는 실내체육관과 대학원 시설이 각각 들어선다.


숭실대는 올해 10월로 개교 110주년을 맞는다. 오래된 학교지만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게 요즘의 숭실대 분위기다. 이는 숭실대가 IT(정보기술)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숭실대는 우리나라 IT산업의 선두주자에 속한다. 1960년대 후반 숭실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IBM 1130 전자계산기를 도입하고 최초로 컴퓨터 교육을 시작했다. 이 학교는 국내 최초로 전자계산학과, 인공지능학과, 소프트웨어공학과, 컴퓨터통신학과를 설치한 대학이기도 하다. 박창희 숭실대 대외협력처장은 “숭실대는 벤처의 요람”이라고 말했다.


1987년에는 정보과학대학원을 신설했고 1996년에는 국내 최초로 정보과학대학을 세워 IT인재 양성을 주도해왔다. 지난해에는 기존의 정보과학대학과 공대 소속이었던 정보통신전자공학부를 통합해 국내 최초로 IT대학을 신설했다. IT대학에는 컴퓨터학부, 미디어학부, 정보통신전자공학부의 3개 학부가 있다.


외부 평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06 대교협 평가에서 IT대학 컴퓨터학부와 정보통신전자공학부는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컴퓨터학부는 정보통신부가 주관하는 IT전공 역량강화(NEXT)사업에 선정돼 2010년 12월까지 4년간 총 12억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숭실대는 ‘숭실 2010 프로젝트’를 수립, 2005년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글로벌 브레인의 양성’이라는 장기발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화, 특성화, 교육의 질 제고를 기본방향으로 정하고 이를 위한 선진화된 교육방법과 첨단 교육시설을 도입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게 핵심이다. 숭실대 이효계 총장은 “오는 2010년까지 1400억원을 투자해 최첨단 교육시설인 종합강의동, 학생회관과 기숙사 등을 신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숭실대는 민간자금을 유치해 시설 확장에 나서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BTO기숙사와 교육문화복지센터가 대표적인 사례. 사업비 330억원 규모의 BTO기숙사는 민간사업자가 20년간 기숙사를 지어 관리·운영수입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14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학생과 교수, 외부 손님을 위한 원룸과 피트니스센터, 세미나실 등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며 2010년 3월 개강 이전에 개관할 계획이다.


숭실대의 두 번째 민자유치 프로젝트는 사업비 700억원 규모의 교육문화복지센터. 사업 타당성 조사를 이미 마치고 6월 중으로 사업공고를 낼 계획이다. 숭실대 민자유치사업의 백미는 광명시와 추진하기로 한 광명 음악밸리의 제2캠퍼스다. 광명 민자역사 부근 2만여평의 부지 매입자금을 포함해 총 투자규모가 4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르면 2008년, 늦어도 2010년 착공 방침이다.


숭실 2010 프로젝트의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2006 한국대학신문 국제교류부문 대상 수상, 2006년 2단계 BK21사업 3개 사업단 선정, 수도권 대학 특성화 사업 선정 등이 주요 성과다. 2006년 주요 대학 취업률은 70.1%로 8위를 차지했다. 입학성적도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최근 2년간 수능성적이 인문계는 17점, 자연계는 59점이나 올랐다.



 







▲ 숭실대 원형광장에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IT와 더불어 숭실대가 역점을 두는 분야가 국제화이다. 14개국 54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해외 유수의 대학과 연계해 교환학생프로그램, 영어·일본어·중국어 연수프로그램 등 다양한 국제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학생복지도 신경을 많이 쓴다. 전교생의 30%에게 교내외 60여종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숭실 인재 양성기금’을 마련, 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 드는 비용을 해마다 7명에게 지원하고 있다.


학생의 사회봉사활동도 활발하다. ‘섬김의 리더십’과 ‘사회봉사’ 수강생은 노인전문병원인 ‘로뎀병원’에 위탁돼 봉사활동을 수행한다. 두 과목은 모두 교양필수 과목이므로 모든 숭실대생은 한 학기 32시간 동안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이효계 숭실대 총장은  “세계에서 통하는 글로벌 인재를 키워 세계 속의 숭실대로 우뚝 서겠다”고 말했다.▒




숭실대 역사와 인맥
개교 110주년… 문화·예술계 등 거목 배출



숭실대는 1897년 10월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 목사가 설립했다. 1906년에는 평양 주민이 숭실대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건립기금 6000원을 모아주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는 1938년 한국인의 얼을 빼앗고 한국 기독교를 억압하려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했다. 숭실대는 이 조치를 거부해 자진폐교를 택했다. 민족정기와 기독교정신을 지키기 위해 극력 저항했던 ‘평양 시대’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 자진폐교 후 16년의 세월이 흐른 1954년 숭실대는 서울에서 다시 문을 연다. ‘서울 시대’의 개막이다.


숭실대가 배출한 인물 중엔 유명 인사가 많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김창준·박희도, 조선물산장려회·신간회의 주역 조만식,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등 민족지도자를 비롯해 문화·예술계 거목들이 숭실대 출신이다.


최근 들어서는 여성벤처협회장을 지낸 송혜자 우암닷컴 사장,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은 김종호 삼성전자 전무, 서재열 CJ 상무, 최우정 다음디앤샵 대표, 김명국 삼성전자 전무 등이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음향 분야의 권위자 배명진 숭실대 교수와 2002 한·일월드컵과 2006 독일월드컵 대표로 뛰었던 태극전사 최진철(전북 현대모터스) 선수도 숭실대 졸업생이다.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글로벌 명문을 향한 캠퍼스 혁명] 이효계 숭실대 총장



“우수 교수 유치 위해 미국·캐나다 주요 도시 순회”
서울 숭실대 제 1기 졸업생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월급 반납하며 혁신 이끌어
하버드대 등 명문대 출신 교수 몰려들어… 2~3년 내 베트남ㆍ필리핀에 캠퍼스 조성




▲ 이효계 숭실대 총장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 광주고를 다니던 이효계 학생은 고교 3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학교 종을 쳤다. 아무리 그가 모태신앙이고 성실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계기는 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기도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놨다. 이때부터 그는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나갔고 55년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나가고 있다. 이 정도면 이 사람의 품성이 어떠한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현재 숭실대 중흥을 이끌고 있는 이효계(李孝桂·72) 총장이다. 숭실대는 이 총장이 2005년 3월 제13대 총장에 취임한 이래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좋은 교수들이 대거 채용되고 있고 학생들의 입학 성적도 급속히 높아지고 있으며 새 건물도 잇달아 들어서고 있다.


숭실대의 긍정적인 변화는 이 총장의 ‘살신성인(殺身成仁)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총장에 취임하면서 “4년 총장 임기 동안 월급을 한 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4년간 총장 월급은 총 5억원에 달한다. 쇼가 아니냐며 빈정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총장의 진심이 알려졌고 사람들은 감동 받기 시작했다. 결과는 숭실대 구성원들의 반성과 심기일전으로 이어졌다.


그는 숭실대 출신이다. “졸업한 지 42년 만에 모교에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모교의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랬다. 당시 숭실대는 노사 관계가 안 좋았고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 반대 극한 투쟁을 벌이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였다. “오죽했으면 총장실 집기에 바퀴가 달려 있었겠어요?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할 때에 대비해서 집기를 옮기기 좋도록 바퀴를 달아놨다는 것 아닙니까?” 학교 재정도 열악한 편이었다. 뭐 하나 좋은 형편이 못됐다.


신앙심 깊은 그는 부인과 1남3녀 등 가족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월급을 안 받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울먹이더군요. 아무래도 살림을 담당하는 주부 입장에서는 그렇겠지요. 큰딸을 비롯한 자식들이 아버지가 마지막 봉사를 하시겠다는데 우리가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우리 부부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파장은 컸다. 고령의 신임 총장이 물질적으로 큰 희생을 무릅쓰고 학교 발전을 위해 진력하는 것을 보고 노조도 임금 협상 때 학교 측에 인상률을 위임했고 이 총장 취임 이후 학생들은 한 번도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벌이지 않고 있다. 교수의 연구를 독려하는 제도를 만들어도 교수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감수한 물질적 손해는 4년치 월급 5억원이 전부가 아니다.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해온 그는 숭실대 총장에 취임하는 바람에 매월 300만원 가량 받던 연금도 못 받고 있다. 자식들이 생활비를 보태준다고 해도 모자라는 게 당연하다. 때문에 그는 지난 4월 5일 자택을 팔아 규모를 줄여 이사를 했다. 그러나 이 총장이 주위에 알리지 않은 탓에 홍보담당 직원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 5월 28일 기자가 이 총장 이력서를 달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는 광주고를 나와 1954년 서울 숭실대 1기생으로 입학했다. 숭실대는 원래 1897년 평양에 설립된 학교였다. 1938년 일본의 신사참배 지시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다가 1954년 서울에 다시 캠퍼스를 연 것이다.


“우리 대학은 실향민 대학인 셈입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우리 대학의 역사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는 “숭실대가 16년의 단절이 없었더라면 더 발전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미션 스쿨인 숭실대를 지원했다. 당시 숭실대에는 그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싶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군수로 재직 중이던 부친이 그에게 고등고시 행정과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하다가 새벽기도 중에 “부친에게 순종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고시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세 번 낙방 끝에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 13회에 합격했다. 13회는 인물이 많기로 유명한 기수다. 동기생은 70명. 이 중 장관이 17명이나 나왔다. 그도 장관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남보다 배 이상 분투해야 했다.


그는 요즘 이른바 ‘스카이(SKY)’로 불리는 학교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기생 중에 우리 대학 출신은 나밖에 없더라고요. 모교의 명예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출근은 항상 오전 7시까지, 퇴근은 밤 12시 넘어서 했습니다.”


그는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 받아 정통 내무 관료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 부시장, 광주직할시장(현 광주광역시장), 전남지사, 내무부 차관, 토지공사 사장을 거쳐 1997년 제49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교수 출신이 아닌 총장이다. 그는 “총장은 교직원과 학생을 지원해주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선 부족한 재원을 조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 숭실대가 민자사업을 활발하게 하는 것도 그의 아이디어에 힘입은 바 크다.
학교발전기금도 열심히 모으고 있다. 임기 4년 동안 민자사업을 포함해 1400억원의 자금을 유치할 계획이다.


좋은 학교를 만드는 첫 걸음은 좋은 교수진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총장에 취임한 지 5개월이 지난 2005년 8월 보직교수들과 함께 뉴욕·LA·토론토 등 미국과 캐나다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한국인 박사과정 학생들과 만나 식사를 하면서 학교를 소개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렇게 총장이 직접 와서 학교 소개하는 곳은 처음 봤다”며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일까. 최근 숭실대가 모집한 신임 교수 채용에는 하버드대 박사 출신 등 미국 내 상위권 10대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이 총장은 “교수 50명을 신규 채용했고, 6월에도 25명 신규 채용 공고를 낸다”고 말했다. 그는 신임 교수의 강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영어 면접까지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2년간 숭실대 학생들의 입학 성적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 총장이 이끄는 숭실대의 혁신 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수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수능 1등급 학생은 4년 장학금과 생활비 보조, 노트북·기숙사 제공, 해외 유학 시 2년간 2만~3만달러 지원 등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놨다. 그는 “2006년도에 수능 1등급 학생이 150명이나 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살 길은 해외에 있다”고 말한다. “국제학부를 만들어 중동·동남아·아프리카 등의 학생을 데려와 한국에 호의적인 글로벌 인재를 육성할 생각입니다.” 그는 “좁은 국내를 상대로 하는 도토리 키 재기식 경쟁을 지양하겠다”며 “2~3년 내 개교를 목표로 베트남·필리핀에 해외 캠퍼스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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