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희원 동문(교양과목 현대인과 성서1 교수, 영문 81)과 만나다
[인터뷰: 송혜수 홍보팀 학생기자(문예창작 09), hyesoo11011@daum.net]
전희원 동문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그가 가르치는 강의실이 있는 백마관 앞이었다. 보통 학생들이 많이 오가는 중문과 정문에서는 다소 멀리 떨어진 곳. 강의를 마치고 백마관 입구 계단에 서있던 그의 손에는 예상과 달리 흰 지팡이가 없었다. 다만 흰색보다 눈부신 전 동문의 밝은 미소와 인사가 있을 뿐이었다.
“나를 시각장애인 전희원이 아닌 아무 수식 없는 전희원으로 바라봐주길 바랍니다.”
“저는 한 가지 크게 자랑할 수 있는데요. 건강한 정신과 행복함을 가졌다는 거예요.”
사실 첫 만남에서 이 두 말은 그가 몸소 보였음이나 다름없었다.
5월, 녹음의 향보다 푸르고 맑은 그를 만나보자.
사고에 대한 원망도, 장애에 대한 비관도 몰랐던 8살
전 동문은 8살 때 친구들과 들뜬 마음으로 떠난 여름성경학교(교회)에서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교회 앞마당에 있는 미끄럼틀에 올라가 노는데, 뒤에 있던 친구가 나보다 먼저 내려가겠다고 나를 밀쳤어요. 아래는 돌계단이 있던 땅이라 떨어지며 머리를 부딪쳤죠. 그 충격으로 망막이 손상을 입었고, 후에 망막박리라는 판정을 받으며 사고가 난지 5~6개월 정도 지나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어요.”
당시 너무 어렸던 탓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전 동문.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함께 덧붙였다. “어머니, 어머니가 갖은 애를 쓰셨어요. 눈에 좋다는 말을 들으시고 간이란 간은 죄다 먹이셨죠. 닭 간, 소간, 돼지 간 등등. 그때 하도 먹어서인지 지금은 간이나 천엽을 절대 못 먹어요.(웃음) 나를 항상 사랑으로 돌봐주시고 옆에서 큰 위로가 돼주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한 해를 치료에 전념하고 10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인천에 있는 한 맹학교에 입학해 점자 교육부터 받았다. 어른들보다 이해력이 다소 부족한 어린 친구들이 배우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점자. 그 외에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직업 훈련을 함께 익혔다. 안마나 물리치료 과목을 정규 교과 과정과 함께 병행하며 공부를 해나갔다.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준 사람들, 그리고 모교
그는 서울 맹학교로 입학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하였다. 하지만 그 옛날 점자로 된 교과서, 수험서가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전 동문은 보이지 않음에도 입시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였지만 당연히 보통의 친구들보다는 학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점자로 된 고등학교 책이 없었기 때문에 수업을 일단 녹음을 하고 그 녹음 한 것을 듣고 필기로 받아 적어 다시 익히는 과정이 늘 필요했어요. 그러다 보니 커피를 많이 마시며 남들보다 잠을 덜 자야했고 밥을 빨리 먹어서라도 시간을 아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 해는 입학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방황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때 등록금을 낼 수 없는 가정형편 등을 이유로 대학 입학에 회의를 느끼던 전 동문에게 친구의 말은 다시 도전 할 용기를 심어주게 된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등록금 걱정은 일단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라고. 꽤 충격이었죠.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말에 공감도 했고요. 결국은 친구의 말에 도전을 받아 다시 대학 준비에 들어갔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입시 시험까지는 시간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피아노과를 지원할 실력은 못돼도 작곡과를 지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곡과 입학을 위해서 배워야 했던 레슨비는 당시 터무니 없이 비쌌다. 다행히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안마, 피아노 과외 등으로 간신히 레슨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의 꿈은 사치였는지도 몰랐다. 음대 지원 탈락까지 맛보고 그는 대학 공부에 더욱 간절해졌다. 특히나 시각장애인은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대학에서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지원을 꺼려해 입학을 받아주지 않았던 곳이 태반이었다. 결국 재수를 끝으로 드디어 숭실대 영문학과 81학번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숭실대는 모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기초한 학교란 생각이 들어요. 현재 모교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부심을 갖는 것도 그때 내게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학교에 보답하는 느낌이 들어서겠죠. 감사한 일이에요.”
그토록 원했던 그의 대학 생활은 어땠을까? “길 가다 이리저리 부딪치기도 일쑤였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부축을 도움 받다보니 늘 여자 친구가 바뀐다며 농담으로 놀려대는 남자친구들도 있었어요. 학교생활은 나름 성실히 임했던 것 같아요. 그때도 참 고마우신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기억에 남는 영문과 동기가 있는데 당시 교회 성가대에서 지휘를 맡았던 저를 도와주기 위해 숭실대 합창 단원이었던 동기가 지휘해야 할 제 악보를 항상 옆에서 불러주었어요.”
어머니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인이었던 전 동문. 정작 신학 공부나 목회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는데 대학 1학년 때 한 계기로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신앙공동체 예수원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대천덕이라는 미국 신부님이 그곳을 맡아, 아픔이 있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곳이었는데 겉모습은 피폐했지만 안은 평화롭고 아름다웠어요. 한번은 정신에 약간 문제가 있던 사람이 신부님에게 다짜고짜 큰소리로 퍼붓는 거예요. 여기 예수원에 모인 사람들 사랑, 사랑하지만 결국엔 다 위선자들이라고. 대천덕 신부님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나지막하게 맞다고. 내 안에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우리 모두 회개하자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떠올렸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닮은 삶이 저런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저렇게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크게 감명 받은 전 동문은 신부님과 비전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신학의 길을 권유받게 되었다. 고심 끝에 목회자의 길을 가리라 결심하게 되고 그는 유학길에 올랐다. Gordon-Conwell에서 신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보스턴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서도 재직하며 목회자의 길을 닦았다. 그곳에서도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가며 버텼다는 전 동문. 미국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아내는 베이비시터를 하며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3년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교회사 박사 과정에 돌입했다. 한국에서도 공부할 때는 남들보다 배로 걸리는 그였기에 유학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생활 영어적인 부분에서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나 박사 과정 졸업을 앞두고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졸업을 하려면 필수 종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두 과목이 통과되지 못해 탈락했어요. 거기다 재시험의 기회를 당연히 줘야하는 교수님께서 기회를 주지 않았고 부당함에 전 학교에 이의제기를 한 상태였죠. 힘듦과 실망감에 하루는 6층 연구실 창문에 기대고 있는데 ‘여기서 떨어지면 그대로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순간 들더라고요. 달리 말하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었던 거죠. 그때 저는 이미 목사였는데도 말이에요.”
그날 저녁, 힘없이 돌아와 TV를 켜는데 우연히 ‘마리아 엔더슨’(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수많은 관중을 열광 시키고 감동적인 노래를 불렀던 미국 흑인여가수)의 사망 소식에 관한 보도를 접한다. 화려한 그녀의 경력을 보여주고 한 기자가 그녀에게 살아생전 질문한 인터뷰를 함께 보여주었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 입니까?’ “수많은 수상 경력이 있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어요.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고 그로 인해 누릴 수 있었던 순간들이 제일 행복했다.’라고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감동이 됐어요. 반짝이는 것에 현혹되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내 자신을 반성했죠. 그리고 다시 공부해보기로 마음먹었고 학교에서는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져 다시 한 번 시험을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끝내 통과하지 못했다.
“시험엔 실패했지만 그땐 처음 실패 때와는 달랐어요. 최선을 다했기에 떳떳했고 부끄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또 그것을 계기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감사할 뿐이었죠.” 박사과정을 수료하진 못했지만 다시 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에게 시기적으로 놀랍게도 코넬한인교회에서 담임 목사에 대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36살, 이른 나이로 그는 17년간 담임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스스로 독립심을 기르는 이들이 되길
전 동문은 코넬대학교에서 장애학생 지원처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그에게 장애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점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는지 물었다. “사실 미국에는 장애학생들을 위한 특별입학전형이 없어요. 이유야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뚜렷한 이유는 그 자체가 장애를 편견 없이 바라보기 때문이죠. 스스로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차별 받지 않아야 하는 취지에서는 필요하죠. 중요한 점은 밥을 떠 먹여 주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능력을 곳곳에서 스스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독립심을 길러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은 좋지만 장애로 인해 누리는 혜택에 취해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나태함은 갖지 않기를 바래요.”
그는 장애로 인해 어두워질 수 있는 면도 조언했다. “다리가 불편하면 남들보다 조금 늦는 것, 넘어질 수 있는 것 아주 당연해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예상치 못한 곳에 부딪치고 다치고 남들보다 느린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고요. ‘왜 나는 이것 때문에 못나고 느릴까…….’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장애로 인해 불편하고 느린 것은 당연하니까. 자책하고 웅크리기보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건강한 자아를 갖고 이겨냈으면 합니다.”
꿈꾸며 공부하던 대학에 다시 돌아와 이제는 후배들을 제자로서 가르침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그.
“저는 우리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만큼 열심히 놀고 제가 누렸던 감사한 만남들처럼 10년 넘게 기억될 수 있는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익히 들어 알겠지만 공부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시기잖아요. 후회 없이 임한다면 꼭 취직을 위한 스펙이 아니더라도 성실함을 갖춘 자신으로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너무 공부만 하다보면 답답하고 편협한 사고를 가지기 쉬워요. 공부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보았으면 해요. 마지막이 사실 제일 중요한데, 전 감사하게도 만남의 복을 크게 누린 사람이에요. 여러분 또한 지금,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인연들을 배려와 사랑으로 보살피며 서로가 빛의 통로 역할을 하는 만남들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덧붙인 부탁도 있었다. “숭실대와 같은 좋은 학교에 다니는 여러분들이 제발 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당히 주어진 것에 노력하고 자신감을 가져야죠. 머리가 나쁘고 공부를 못하는 것은 용서가 되어도 인격을 망가뜨리는 건 용서할 수 없는 거예요. 그저 세상 기준대로만 바라보려 하지 말고 자신감 있는 각자의 관점으로 넓게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부탁인데요. 나를 수식하거나 바라볼 때 시각장애인 전희원이 아닌 아무 수식 없는 그냥 전희원으로 바라봐주길 바랍니다. 사실 그게 정상이고요. 어떻게 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내 고향이 인천이고 일주일에 두 번 학생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에요.”
그를 있게 한 멘토, 스승
스승의 은덕에 감사하고 존중하며 추모하는 뜻으로 기념하는 스승의 날. 우리의 스승 전 동문에게, 그의 스승은 어땠는지 물었다.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그 중 네 분 정도가 기억에 오래 남는데요. 숭실대 재학 당시, 인문대 행정직에 계셨던 변성범 선생님께서는 지도 교수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학교에서 필요로 했던 공부에 대한 도움(교재 등)을 많이 주셨던 분이세요. 학문적으로 저를 가르치신 건 아니지만 늘 삶으로 교훈을 주시고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라 지금까지 연락할 만큼 감사한 분이에요. 또 어머니와 같았던 교육학 조의숙 교수님, 학문에 대한 성실성을 깨닫게 해주신 독문과 김홍진 교수님, 학자로서 따뜻하게 저를 가르쳐주신 영문과 김영철 교수님까지. 지금은 다들 퇴임하셨지만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분들은 아니지만 짧지만 늘 제 기억 속에 남아있어요. 감사합니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당일 전 동문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인사하는 제자의 모습에서 그 옛날 스승에게 감사하며 공부했을 대학생 그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는 한 가지 크게 자랑할 수 있는데요. 건강한 정신과 행복함을 가졌다는 거예요.” 그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전희원’이 아닐까.
* 전희원 동문(영문 81)은 본교 영문학과 졸업 후 Gordon-Conwell 대학에서 목회학 과정을 수료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교회사를 수학했다. 유학 당시 보스턴 한인교회 전도사와 코넬 한인교회 담임목회자로 17년 간 시무했다. 코넬대학교 교목 및 장애학생지원처 자문위원, New York Bible Conference 강사, 그 외 국내 다수 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에서 설교자 및 강사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계명문화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기독교 교과목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