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동문(사회복지대학원)

2013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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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동문(사회복지대학원)

KBS 보도본부서 활약…꿈과 행복 전하는 방송인

[인터뷰: 최한나 홍보팀 학생기자(기독교 09), skyviki@naver.com]

2011년 국내 최초 장애인 앵커가 탄생했다. 지원자는 무려 523명. 장애인 앵커 채용은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BBC 방송에서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여 단기 채용한 사례는 있어도, 장애인 앵커가 장기간 뉴스를 맡아 진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주는 책임감을 절감한다는 이 동문은 또한 그만큼 열정적이었다. 프리랜서 앵커로서 다양한 일정을 소화해내며 바쁘게 보내고 있는 이창훈 앵커를 어렵게 만나봤다.

생후 7개월, 시신경 훼손으로 실명

이 동문은 생후 7개월 때,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척수에 물이 차는 뇌수막염을 앓았다. 그 후유증으로 시신경에 문제가 생겼고, 그는 시각장애 1급을 판정받았다. 이 동문은 초등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이왕 하는 공부라면 제대로 시켜야겠다는 부모님의 바람이 담겨있었다. “기숙사 생활로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고 서울말이 아닌 사투리를 쓰다 보니 혼자된 기분이 컸어요. 그래서 방학 마다 집에 가면 어머니께 ‘방학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때문에 공부에 의욕도 없었고, 학습능력도 부진했다. 하지만 4학년 때 학교에서 트럼펫을 배우며 어린 이 동문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줬어요. 그렇게 자신감이 쌓이다보니 자존감도 높아지고 성격도 밝아지더라고요.” 이후 그는 한빛맹학교 학생회장으로 활동하고, 음악, 체육관련 각종 외부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학생 때는 방학이 돼도 집에 안내려갔어요.(웃음)” 10대 시절이 의례 그렇듯, 그 또한 친구가 그저 좋았고, 여자 친구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공부는 말할 수 없이 하기 싫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괜히 반항적이잖아요. 그래도 그 시기에 제 장애에 대한 자괴감은 없었어요. 너무 어려서 실명을 해서 그런지, 그 부분을 하나의 불편 정도로만 인식했거든요.”

‘자기애’에서 시작한 사회복지학

시력을 잃은 뒤, 이 동문의 부모님은 어린 아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크게 괴로워했다. “저를 치료하시기 위해 안 해보신 게 없으셨어요. 마지막에는 교회를 찾아가셨는데, 신앙생활을 하시며 저에 대한 마음의 빚을 덜어내셨어요.” 이를 계기를 부모님은 그에게 목회자가 될 것을 권유했다. “저도 별 고민 없이 ‘해보지 뭐’하는 생각으로 목회자를 꿈꿨어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는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과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얼마든지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자신은 그만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목회자라면 수준 높은 양심과 도덕을 지녀야하는데, 저는 그럴 자신이 없었어요.” 생각을 바꿔 그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남의 불편을 걱정하는 이타심이 아닌, 전맹시각장애인인 제가 살기 편하도록 불편한 것들을 해소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이후 서울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 숭실대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친구의 독설 아니었다면, 건방진 앵커 될 뻔

남의 불편보다는 자신의 불편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만큼 자신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자존감이 높아지고, 상대방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면서 점점 교만해졌어요.” 자기 안의 진정성보다는 외적으로 보여 지는 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사귄 친구들 덕분에 그는 비로소 자기 안에서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그 친구들은 잘한 일에도 과장해서 칭찬하지 않아요. 또 못하면 못한다고 말하죠. 칭찬에 익숙한 제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었어요.” 전에는 자신의 장점을 자신의 능력의 결과로만 생각했다면, 지금 그는 옆 사람의 도움에 감사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사람을 능력으로만 평가하는 기능적인 사람이었다면, 저는 지금 건방진 앵커가 됐을 겁니다.”

523:1 경쟁률, 준비된 자에게 오는 기회

이 동문은 현재 KBS 보도본부 프리랜서 앵커로, 523: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은 국내 최초 지상파방송 장애인 앵커다. 그는 사실 앵커가 꿈이 아니었다. “저는 지금 제게 주어진 것에만 충실히 집중하는 편이에요. 수업 때는 발표를 도맡아서 했어요. 팀 발표의 경우 제가 자료정리를 맡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발표를 맡은 것도 있지만, 먼저는 제가 발표를 좋아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죠. 앵커 시험에 뽑힌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네요.” 2007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인터넷방송(KBIC)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 동문. 알게 모르게 쌓아온 경력 때문일까. 그는 KBS 장애인 앵커 모집에 도전, 단번에 합격했다.

합격했지만 앵커 되기 쉽지 않아

물론 합격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KBS의 앵커들이 진행하는 뉴스를 꼼꼼히 들었다. 그리고 기사를 점자로 번역하여 입 안이 헐도록 따라 읽었다. 지인들에겐 자신이 읽은 녹음 기사를 들려주어 부족한 점을 교정 받았다. “이 분야에 종사하시는 선배님이 안 계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준비해야했어요. 면접 날에는 진주에서 미용실을 운영하시는 어머니께서 서울까지 오셔서 직접 메이크업을 해주셨어요.” 만반의 준비 끝에 합격의 기쁨을 맛본 이 동문은, 뉴스 진행을 위한 3개월간의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 동문은 아나운서 취업 관문인 아카데미 교육을 받지 않은 원석 그대로였다. “아나운서가 갖춰야할 발성, 발음, 한국어 문법 등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습니다.” 뉴스 데스크에 앉아 직접 작성한 앵커 멘트를 시청자에게 전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기초 작업이었다.

라디오 DJ, 야구해설가 … 다양한 활동 통해 ‘의미’ 얻고 싶어

“많은 돈은 벌 수 없지만, 반복적인 일상의 지루함은 없어요.” 그가 말한 앵커의 매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문은 앵커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 중이다. KBS2 TV ‘사랑의 가족‘의 ’이창훈의 마주보기‘ 진행, KBS3 라디오 ’내일은 푸른 하늘‘의 행복뉴스코너 DJ, 사회복지 전문채널 복지TV의 앵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야구해설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때마다 장애인의 목소리가 필요한 곳으로 강연도 다닌다. 이 외에도, 그는 SK 봉사단과 함께, ’보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소리‘로 여행을 담는 의미 있는 작업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앵커이기 때문에 삶의 안정감은 부족해요. 하지만 이런 의미 있는 일들을 누적해서 하다보면, 그것들이 또 제 삶을 지탱해줄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 알고 보면 세상은 안정적이지 않은 곳이잖아요. 몇 초 앞도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 그는 다양한 파고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 말했다. “저도 지금 대학생들의 삶과 똑같아요. 방송 외에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말하기‘라는 재능을 통해 돈으로 살 수 없는 ’의미‘를 얻는 데에 제 삶의 우선순위를 두려고 노력합니다.”

지난 22일, 이 동문은 타이완 출신 주대관 시인의 생명사랑을 구현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세계생명사랑국제상’을 수상했다. ‘시각 장애인 앵커로서 시청자에게 꿈과 희망을 일깨워 준 것’이 수상 이유다. 국내 최초 장애인 앵커라는 자리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만큼 책임감이 크다는 이 동문은 앞으로 계속 좋은 아나운서로 정진할 뜻을 전했다. “시각장애인이 뉴스 앵커를 맡는다고 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어요. 하지만 방송을 통해 꾸준히 시청자 분들을 찾아뵈니, 언제부턴가는 저를 시각장애인보다는 앵커로 많이 기억해주시더라고요. 장애인 인식개선에 참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치열함 속에서 여유를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치열함이 가져다주는 성과만 생각하다보면, 잃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친한 친구를 잃어선 안 되잖아요.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를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의 조언을 듣자니, 여유롭고 따뜻한 바로 이 아나운서를, 이 한 사람을 혼자만 알기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머지않은 날엔, 국내 최초 장애인 MC로도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선전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