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편집장 고경태 동문(영문 85)

200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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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일관된 사람이다. 경력만 봐도 그렇다. 학생 시절엔 학보사에서만 3년 간 활동하면서 편집장 자리까지 역임했고, 졸업 후엔 작은 신문사에서 2년여 동안 일한 후 94년 창간된 <한겨레21>에 입사했다. 그는 기자로, 편집자로, 기획자로 12년 8개월을 일했고 마지막 1년 6개월은 편집장을 지냈다. 후엔 생활문화매거진섹션 로 이직해 창간부터 2년을 일했고, 지금은 씨네 21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말 그대로 묵직하게 한 곳에서 열정을 쏟아붓는 그, 고경태(영어영문·85학번) 동문을 만나 보았다.

    00호의 역사를 넘은 만남


동문이라고 하지만 기자들에게는 대선배기도 했다. 31기 숭대시보 기자였던 그는 격동의 80년대 중반 편집장을 역임했는데, 당시 숭대시보는 지령 500호를 맞이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숭대시보가 다시 500호를 거쳐온 상황에서, 1000호를 준비하는 지금의 후배들인 기자들도 고경태 편집장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언론 선택은 ‘사명’ 아닌 ‘감성’


어떻게 그는 학보사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사실 그는 처음에 영자신문을 생각했다고 한다. 영문학과 신입생으로 입학하고 선배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학회장은 영자신문사를 추천했고, 오히려 “국자 신문사는 힘드니까 가지마라”고 말했단다. 국자신문사는 다분히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치뤘는데 합격했고, 그렇게 그의 대학 3년은 학보사와 함께하게 됐다. 그러나 학보사 입사 때와 마찬가지로, 활동중에도 딱히 이 경력을 언론 쪽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졸업 후 군대까지 다녀와서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다분히 감성적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시대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진보·보수를 떠나서 그 시대를 살면서 느낀 게 있었고, 거기에 반하는 길은 가지 않겠다는 생각만은 하고 있었다.

    편집기자가 되다


94년, 한겨레는 <한겨레21>을 창간했고 이를 위해 경력기자를 공채했다. 그가 한겨레와 연을 맺은 것도 이 때부터였고, 이후 15년을 줄곧 한겨레 기자로서 살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는 ‘편집기자’라는 명칭을 달게 됐다. 제목 달기부터 기사 배정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위치였다. 소위 메이저 언론이라 불리는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아니라 막 시작한 신문사에서 일했던만큼 ‘교육’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방법을 깨우쳐야 했다.

“우리학교 학보사 88학번 기자들에게 편집을 가르친 적도 있고, 교수신문에서 주최하는 대학기자교육이나 한겨레 교육문화센터 강좌도 진행했지.” 힘들게 배웠던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는 게 강좌를 하게 된 이유였다. 최근에는 관련 책도 출판했단다. 어떤 내용인지, 편집의 핵심은 무엇인지 궁금해 하자 고 편집장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국어. 제목이 중요하니까.” 언론매체의 글쓰기는  얼마나 맞춤법을 잘 맞추고, 얼마나 단어를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정리하고 구성하는 능력이 우선이란다.


발칙한 상상, 생각을 전복하라!


편집은 진부한 기사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의 하나가 창의성이다.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할 수 있을까. 답변은 간단했다. “상식을 뒤집어보는 거지.” 대표적인 예가 한겨레21에서 인기를 끌어 책까지 나왔던 <쾌도난담> 코너다. 김어준과 이규항씨가 인터뷰 대상과 솔직담백하게 나눈 대담코너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인터뷰가 지나치게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가 진지해야 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나 감정에 솔직하게 하고 싶은 얘기 다 해보자는 컨셉은 높은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후 여기에 영향을 받은 형식의 인터뷰가 유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흔히 볼 수 있는 ‘독자인터뷰’도 그가 “왜 독자의 목소리는 듣지만 그 독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처음 시도한 기획이었다.



    금기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대


그에게 있어서 같은 사건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겨레21에서 2000년 베트남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모두가 한국군에 대해 ‘고엽제의 피해자’로서만 다룰 때,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고발하는 시선에서 다룬 내용이었다. 난리가 났다. 전우회에서  몰려와 신문사를 막고 기계를 파손해 한겨레에서 약 7천여 만 원의 피해가 났다고 한다. <시사저널> 사태 때도 같은 언론계 일이다보니 다들 쉬쉬하고 있었는데, 그걸 또 과감하게 썼다. “그걸 깨려고 작심한 게 아니라 마감이 닥쳐오는 상황이어서….” 쓰기 좋은 글감이어서 썼다지만 여파는 컸다. 민사며 형사며 <시사저널>측에서 고소를 해서 1년 넘게 법정에 서야 했단다.




다 재밌는 거지


어려운 경험이었을 텐데 그 때를 회상하는 그의 모습은 담담하기만 하다. ‘힘들지 않으셨냐’고 묻자 의외의 응답이 날아온다. “재밌는 경험이었는데?” 그랬다. 고 편집장은 상당히, 아니 심하게 낙천적이었다.


 고 편집장은 대부분 창간매체에서 일해 왔다. <한겨레21>이 그랬고, 편집장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출범하는 생활문화섹션지 로 발령이 났을 때도 그랬다. 슬슬 가 안정권에 오르자 이번에 가게 된 곳은 <씨네21>이다. 이곳은 창간한지 오래된 곳이지만 어떻게 보면 고 편집장에게는 다른 데보다 더 어렵다. <씨네21>은 한겨레에서 가장 독특한 색채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역대 편집장 중에 영화 관련 경력이 유일하게 전무해, 내가 잘 모르고, 생소하고.” 그럼 제일 어려웠던 기억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없는데. 그냥 다 적응하는 거고…배우면 재밌고 그렇지.” <씨네21>하면서 악플도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근데, 그게 어려운건가?” 우문현답. 그 분, 정말 재밌게 사시는 분이셨다.




시대정신을 갖고, 놀이터에서 놀자


그가 그렇게 긍정적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가 기획에서 추구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기획은 놀이터여야 한다는 것. 시대는 우울하지만 만드는 사람도 밝고, 보는 사람도 밝아질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시대정신이다. 엄숙할 필요는 없다. 사회가 황폐화됐으면 그건 알릴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이럼 안되잖아!”로 목소리만 높여가기보다 명랑하고 긍정적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고 얘기하자는 거다.


언론이 뭔가를 보도함으로써 정치적 무관심을 한칼에 날려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론인은 꿈을 꿀 수 있잖아. 자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그는 오늘도 시대정신을 갖고 노는 ‘놀이터’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의 세상을 향한 ‘놀이’가 더욱 즐겁길 바란다.       




이소현 기자(숭대시보 제공)